돈 들일 일 없이 얼마든지 놀던 카지노 게임
지금의 어른들이 어릴 때는 뭘 하고 놀았는지 궁금해할 것 같다. 컴퓨터도 없고 인류가 휴대폰은 생각도 못할 때도 놀거리는 많았다. 당연히 모두 아날로그적 실물 게임이었다. 어릴 적 형제들이 동네 애들과 놀던 카지노 게임 즉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야구룰의 고무 공카지노 게임, 골목 축구 등등의 바깥카지노 게임는 건너뛰기로 하고, 집안에서 우리 형제들이 즐기던 실내 카지노 게임로는 바둑, 장기, 다이아몬드 게임을 꼽을 수 있겠다. 예외적으로 실내에서 땀 흘리며 신났던 레슬링도 있다.
바둑
아버지께서 형제들에게 바둑을 장려하셨다. 당시에는 바둑학원은 없었다. 기원에 다니거나 누구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어깨너머 눈썰미로 자연히 배웠다.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살고 어떻게 되면 죽는지부터 배우니 그야말로 죽자 사자 상대방 돌을 잡도록 싸우자는 ‘싸움 바둑’이었다. 그래서 지면 화가 나고 약이 올랐다. 그러다가 결국 나의 집이 많으면 이긴다는 바둑 철학이 업그레이드가 되고 판세를 읽는 안목이 생기면 기풍이 약간은 고상해진다. 포석을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자꾸 두다 보면 세력을 보는 안목이 더욱 넓혀지고 상대가 있지만 몇 수 앞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보일 때도 있다. 아버지께서 어린 형제들에게 바둑을 두라고 권하신 이유라고 믿는다.
아버지의 형제들 즉 큰아버지부터 막내 숙부님에 이르기까지 바둑 솜씨는 엇비슷했다.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에서 어른들이 모이면 의례히 아버지 방에서 바둑판이 펼쳐졌다. 내가 볼 때 2급에서 5급 정도의 수준이셨던 것 같다. 그걸 보고 배웠으니 우리 형제들의 수준도 딱 그 정도였고 마치 서로 즐기기 좋은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매일 배달되는 신문에도 바둑 사활 퀴즈가 실리고 형제들은 그 문제를 푸느라 골몰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재미를 느껴가며 바둑을 두었던 것 같다. 독학 치고는 꽤 수준이 높았던지 가끔 대국 후에 아버지가 감탄하고 칭찬해 주셨다. 그러다 갑자기 바둑에 흥미가 사라져서 다른 곳에서는 아예 바둑을 못 두는 체했다. 형제간에도 바둑을 즐겨 두었는데 바둑을 두면서 많이 다퉜다. 대개 한번 물려주라, 못 물려준다로 시작되는 작은 말다툼에 형이 약이 올라 쥐어박으려 하면 집밖으로 도망가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한 번은 둘째 형에게 쫓겨 집에서 한참 먼 사직공원까지 도망간 적도 있다. 가끔은 구경하면서 못 참은 결정적 훈수가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형제들이 모두 장성하자 바둑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는데 열기는 식었다. 맘만 먹으면 누구하고 라도 한판 즐길 수 있을 실력이었고 집에 바둑판과 돌도 두벌씩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아마도 입시 전쟁에 돌입해야 할 학년이 되면서부터 형제들은 하나 둘 바둑에 심드렁해졌다. 그래도 아버지와 숙부님들의 대국 열기는 한결같아서 바둑은 여전히 우리 집 제1의 오락이었다. 어쩌다 휴일이나 명절에 아버지와 대국하실 숙부님이 오지 않으면 우리 형제들 중의 누군가가 이층의 아버지 방으로 올라가 대국을 해드려야 했는데, 우리는 대개 큰형을 희생양으로 밀어 올렸다. 한 명의 봉사로 다른 네 명의 형제들은 오랜만의 흡족한 정담과 수다를 즐길 수 있었다.
장기
집에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장기 판과 장기짝이 있었다. 푸른색으로 한자가 각인된 초(楚) 나라의 16 짝과 붉은색으로 각인된 한(漢) 나라의 16짝, 합해서 32짝이 한벌인데,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와 각자의 이름 외에 자연스럽게 접하고 익힌 한자일 것이다. 초한(楚·漢)에 더해 차(車), 포(包), 마(馬), 상(象), 사(士), 졸(卒), 병(兵)이 그것이다.
장기판에 그어진 가로 10줄, 세로 9줄을 따라 차포마상의 행마 규칙 즉 장기의 기본적인 룰은 너무 쉬워서 이내 익히고 재미 삼아 두었지만 게임 흡인력은 바둑이 월등했다. 형제들의 장기에 대한 관심이나 두는 수준은 비슷했는데 진지하게 장기를 둔 기억은 없다. 형제들 모두 커서도 장기를 가까이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이아몬드 게임
그 시절 집집마다 있던 카지노 게임 도구인데, 하얗고 둥근 플라스틱 통 표면에 73개의 구멍이 육각 별모양으로 뚫려있고 6개의 삼각형에 10개의 빨강, 노랑, 초록의 말들을 꽂아서 규칙에 따라 반대편 삼각형으로 이동시키는 카지노 게임이다. 두 명이나 세 명이 함께 놀 수 있는데, 단순하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꽤 집중되고 재미가 있는 카지노 게임였다. 60년대 중반 이전에는 없던 카지노 게임가 갑자기 지방 도시까지 퍼진 전국적인 가정용 유행 게임이 됐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카지노 게임가 두뇌 발달의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소문나서 대 히트를 친 것 같다. 이 게임도 형제들이 모두 막상막하였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교대로 즐겼는데 가끔 이 게임을 서로 먼저 하려고 동생들과 티격태격했던 기억도 아스라 하다. 게임이 끝나면 빨강 파랑 노랑의 작은 플라스틱 말들을 통 안에 쓸어 담고 말판인 뚜껑을 닫으면 되니 가볍고 편리한 이동식 게임 도구였다.
레슬링
우리 어릴 땐 단연 프로레슬링이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김일과 천규덕 그리고 땅꼬마의 시합이 생각난다. 학교 운동장에 링을 만들어 놓고 시내에 대대적으로 가두방송을 하며 레슬링 시합을 알리는 날이면 운동장에 인파가 구름처럼 몰렸다. 그렇게 한 번씩 동네에 레슬링 붐이 일어나면 모두가 레슬링을 했다.
형제들도 두 명씩 편을 짜서 하는 태그매치 흉내를 내며 놀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외출하셨을 때 이때다 하고 장롱 안의 요와 이불을 큰방에 모두 깔아놓고 레슬링 시합을 했다. 큰형과 넷째, 작은형과 셋째인 내가 편을 먹고 하는 태그매치는 과열이 되어 정말로 싸울 듯이 시합을 했다. 심판인 막내는 단연 허수아비였다. 이불 홑 껍질 바느질 땀이 여기저기 터지고 솜이 삐져나와도 노는데 정신없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이 광경을 보고는 한숨을 쉬셨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모두가 빨개진 얼굴로 너무 일찍 끝난 판을 아쉬워했다. 이불을 펼쳐놓고 터진 곳을 꿰매는 대 바느질을 다시 하는 어머니를 형들과 도우며 매우 미안해했던 것 같다. 이럴 때면 어머니는 우리들을 ‘이 모질이들’로 부르셨다.
카지노 게임 놀이를 돌이켜보니, 바둑이나 장기나 다이아몬드 게임이나 다 돈 들일 일 없는 카지노 게임이자 시간 제약 없는 카지노 게임였다. 아이 때 배워 놓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놀 수 있는, 나이 제한 없는 카지노 게임였는데 어느덧 까맣게 잊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