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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Oct 23. 2023

6화 그녀는 진초록빛의 오로라였다

아침부터 카지노 쿠폰 마음이 콩닥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일까?’ 흰머리는 속마음을 남들이 볼 수 없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왜? 내가 뭘 잘못했어? 당당하여지자고. 나답지 않게 뭘. 부끄러워하는거야..’


흰머리는 늘 큰소리를 치고 다녔으나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치부해 두고 있었으나 옆구리가 허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허전한 옆구리야말로 자신이 원하고 바랐던 일이 아니었던가. 싹싹 쓸어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허전함을 불러내 버린 것은 신문사에서 같이 밥과 술을 먹고 마셨던 편집부장님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마음이 없는데 순전히 그 부장의 부탁 때문이라는 거야?”

“그렇다니까.”

“얌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니가 부장한테 매달린 거잖아.

오늘따라 찰랑머리와 꽁지머리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다. 친구들에게 말한 자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니놈들 맘대로 생각해라.”


얼마 전 신문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를 만나 밥을 먹었다. 몇 달 만에 만나고 보니 반가워 술도 한잔 마셨다.

”흰머리 너 소개팅 한번 해라. 내가 날짜도 정해 놨다. 딴소리 말고 이번 목요일 점심 같이 먹으며 말 좀 섞어봐라.“

선배는 여전했다.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정해놓고 통보하는 것은 현역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네 그럴게요.”

선배를 잘 알고 있는 까닭에 흰머리는 고분고분하게 받았다. 거절하거나 무엇인가 토를 달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알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에 혼자 되었는데 너하고 딱 맞을 여자다.”


흰머리는 이발소를 다녀올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무슨 특별한 게 아니라, 그냥 점심을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흰머리는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흰머리는 약속 장소로 가는 버스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취재차 갔다가 만난 여자와 깨지락거리는 시간을 보내다가 무잇에 홀린듯이 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 한 달 만에 결혼을 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든 것을 아내가 맡아 길렀다. 신문사 일이라는 것이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꾸리기에는 너무나도 결이 맞지 않았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흰머리는 하숙생이 되고. 말았다. 늦은 귀가와 잦은 출장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지만, 고부간의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사이는 급격하게 쪼개졌다. 딸을 사위에게 넘겨주고 여섯 달 만에 흰머리는 혼자가 되었다. 흰머리는 자신이 안고 있는 업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여자만나러 가는 것은 정말 선배의 강요 때문일까? 현관문을 열었을 때 와락 달려드는 어둠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사내라고 아득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그 알량한 성욕 때문일까?’

흰머리는 머릿속에서 무수한 상념들이 얽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세 가지가 모두 이유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다.

“(정희씨와) 점심을 먹으러 오는 걸음을 헤아려 보았는데, 걸음의 방향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늙은이의 흐트러진 걸음이라고 받아 주십시오.”

흰머리는 ‘정희씨’라는 말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빼었다.

볶은 새우에 시금치를 곁들여 집어 들며 여자가 가벼운 목소리로 받았다.

“늙은 걸음도 방향은 있는 법이지요.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깨가 서 말’이라고 하는데 곁에 누군가가 없는 ‘혼자’로 사는 것은 여자가 더 힘들다는 느낌을 많이 받거든요. 행복은 늘 손아귀를 벗어나 있더라고요.”


흰머리는 수선스러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늙은 여자가 ‘혼자’ 사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행복’은 더 아스라이 먼 곳에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어렵게 어렵게 취재해서 작성한 기사가 데스크에서 밀려났을 때 맛보았던 공허함하고는 결이 달랐다.

흰머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혜연옥’의 문을 열었다.

“뭐야? 왜 혼자 오는 건데?”

술집 여자가 소주부터 한 잔 따라준다.

“‘혼자’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여자를 만났어.”

안줏거리를 내오던 술집 여자는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흰머리를 바라보았다.

“‘혼자’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여자를 만났다니까.”

술집 여자는 따라 놓았던 술잔을 들어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다. 영양탕이나 한 그릇 먹고 일찍 들어가.”

술집 여자는 흰머리의 속에서 몰아치고 있는 소용돌이를 보았다. 아무도 멈출 수 없는 그 커다랗고 혼란스러운 소용돌이를. 뿜어낼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는, 늙은이들에게 그것은 흉악한 악마같은 것이라는 것을 술집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을 나서는 흰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딘지 어깨가 좀 내려앉은 듯한.

일주일이 지난 저녁 무렵, 흰머리는 ‘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주일이 걸렸네요.”

“사전을 보니까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라고 하는데요. 그 충분한 만족과 기쁨은 누가 판단하는 걸까요?”

흰머리는 자신이 조금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죠?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 힘든 거라니까요. 호호호. 지금 나오세요.”


가느다란 음악이 하늘거리는 작은 찻집에서 흰머리는 ‘정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쏜살같이 내뱉었다.

“지금 성욕을 느끼는 것도 행복일까요?”

“호호호, 늙은이들에게는 정욕情欲이 더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요? 옷을 벗지 않아도 오르가즘을 즐길 수 있는.”


흰머리는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신경림 시인의 『갈대』의 한 구절을 읊고 있었다. 숨겨놓고는 있지만 지워버릴 수는 없는 지나간 날들. 그 안에서 단단하게 화석이 되어버린 삶의 부분 부분들. 지우고 지우고, 닦고 닦아도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그날들을 흰머리는 어쩌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날마다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흰머리는 아무도 없는 혼자였다. 딸이 보고 싶었고, 아내가 그립기도 했다. 그의 모든 것은 그를 잡아 흔들었다. 그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을 수 있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흰머리는 속울음을 울었고, 그 울음이 자기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체하고 살았다.


‘정희’는 오로라였다. 극지방에서 신비롭게 빛을 발하는, 그래서 자신은 다가설 수 없는 오로라.아침이면다 사라져버리는 오로라. 흰머리는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일으킨 ‘성욕性慾’을 ‘정욕(情欲)’으로 가다듬어 놓은 ‘정희’는 진초록빛의 오로라였다.


컴컴한 골목으로 들어서는 그때, 전화가 울렸다. 정희였다. 흰머리는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아주 잠깐 스쳐갔다.

골목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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