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벨이 울려 전화를 받으면 수화기 건너편에선 여지없이 카지노 게임 이름을 불렀다. 타이밍을 놓치면 서로 민망한 상황이 올까, 나는 재빨리 목소리의 정체를 밝히곤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카지노 게임 아니고 딸이에요."
"오메, 너 일애냐? 세상에 카지노 게임랑 전화받는 목소리가 어쩜 똑같다잉."
카지노 게임와 나는 닮은 구석이 많다. 작은 키, 쌍꺼풀 진 눈, 둥근 코, 작은 입매. 무엇보다 닮은 것은 무엇이든 혼자서도 잘한다는 것. 카지노 게임가 사별한 남편 없이 뭐든 혼자서 해 내었던 것처럼, 나는 바쁜 카지노 게임 없이 뭐든 혼자서 잘 해냈다. 그게 우리 집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오죽하면 상견례 때 '집안일은 안 해봐서 부족할지 몰라도 자기 맡은 일은 알아서 잘하는 딸'이라 소개하셨을까.
그런 카지노 게임와도 생판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카지노 게임의 야무진 손 끝. 어렸을 적 카지노 게임는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침대 위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의 침대를 모두 덮을 만큼 큰 이불에 하나하나 손 바늘로 네모 칸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 만들어진 네모 안에는 하트 모양으로 수를 놓았다.
대단하다고 칭찬하면 될 것을, 수를 놓는 카지노 게임 모습이 이유를 알 수 없게 싫었다. 내 취향과 상관없이 모든 물건에 수를 놓는 카지노 게임가 미웠던 걸까. 멀쩡한 이불에 왜 그러고 있냐고 핀잔을 주었다가 '네가 카지노 게임를 아냐'며 타박받기 일쑤였다. 카지노 게임는 밤마다 침대에 앉아 수를 놓았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이,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없이. 그렇게 수를 놓던 카지노 게임는 벌써 30년째 혼자다. 카지노 게임가 혼자 있는 모습이 이제는 내게도 너무 익숙하다.
"입국심사 떨리지 않았어?"
"아야, 내가 누구냐. 비행기에서 옆에 앉았던 청년이 내 앞에 줄 서있길래 좀 도와달라고 했제. 노프로블럼이제!"
"아이고 참나. 암튼 잘했네!"
영어 '한 자리' 못한다고 걱정하던 입국심사도 카지노 게임만의 방식으로 무사히 통과했다.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무거운 짐을 어떻게 혼자 공항 카트에 옮겨 담았는 지도 너무나 알 것 같다. 카지노 게임는 혼자라도 못할 것이 없다. 내가 남편 따라 캐나다에 온 지 4년 만에 드디어 카지노 게임가 혼자서도 무사히 캐나다 우리 집에 도착했다.
"진짜 혼자 갈 수 있겠어? 차라리 다음에 와서 같이 가."
"오메, 다음이 어딨대. 갈 수 있을 때 가야제. 혼자 어디 가는 게 하루 이틀이냐. 씩씩하게 또 놀다 오면 되제."
캐나다까지 왔으니 열심히 구경 다니자고 세워두었던 여행 계획이갑작스러운남편의 다리 부상으로취소되었다.카지노 게임는 혼자 패키지여행이라도 가시겠다 했다. 아무리 한인 여행사 패키지 상품이라지만 나이 드신 분이 친구도 없이 패키지 외국 여행이라니. 나는 '괜찮겠어?' 물었고, 카지노 게임는 '괜찮아.' 대답했다. 그 짧은 대화 하나로 우리는 차로 9시간 걸리는 캐나다 퀘벡 여행을 덜컥 예약했다.
7박 8일이 되는 긴 일정. 여행사에 준 일정표를 보니 숙소를 옮기는 날인데 늦은 밤이 되어도 잘 도착했다는 연락이 없었다. 밤이 깊어서야 연락이 온 카지노 게임는 방이 아닌 호텔 로비에 있다 했다. 와이파이 연결이 안 돼서 이 사람, 저 사람 부탁하느라 애를 먹었다보다. 게다가 오늘은 자유시간이 주어져 돌아다니다 길을 잃어, 식은땀이 쭉 났다는 이야기까지. 덤덤하게 말하는 카지노 게임처럼,나도 애써 무던히 다행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조금, 후회가 되었다.
'와이파이 연결하는 법 좀 연습시켜서 보낼걸...'
나이 드신 분이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에서 얼마나 혼자 진땀을 뺐을지 눈에 선하다. 패키지 여행사 픽업장소에 데려다 주기만 했을 뿐,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정말로 나는 이 여행까지도 혼자서 잘하실 거라생각했던 걸까?혼놀, 혼밥의최고 레벨이라며 놀리기나 했지, 이제와 보니 무슨 용기로 카지노 게임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카지노 게임가 혼자인 모습이 내게 너무나 익숙해서. 그것이 나의 기막힌 변명일 뿐이다.
두 달 더 캐나다에 머물렀던 카지노 게임는 나에게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아냐고 물었다. 캐나다 동쪽 끝, 푸르른 언덕 위에 초록색 지붕 집이 있는 곳. 소설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된 작은 섬이다. '거기는 너무 멀겠지' 라며 아쉬워하는 카지노 게임를 보고, 카지노 게임가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손녀들 준다고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어 온 손가방도 빨간 머리 앤 이다. 할머니가 유튜브로 보는 빨간 머리 앤 만화는 손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안성맞춤이었다.
"할미! 할미는 빨간 머리 앤이 왜 좋아요?"
"응, 빨간 머리 걔는 쪼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솔차니 씩씩하더라? 그래서 좋지!"
카지노 게임의 말을 들으니 앤의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다. '미워하는 마음을 품거나, 억울하다고 속상해하면서 세월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아.' 빨간 머리 앤처럼, 살면서 카지노 게임도 되뇌던 말이었을까? 미워하고 억울하고 속상해할 불행이 카지노 게임 인생에 있었다는 말 같아 어쩐지 기분이 별로다. 그냥 아무도 미워해야 할 사람 없이, 억울해서 가슴 치는 일 없이 사는 인생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옆에 있는 남편에게 의지 해 가며 조금 덜 씩씩해도 될 인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카지노 게임를 닮은 나에게도, 나를 닮은 카지노 게임에게도 우리의 씩씩함은 결국 결핍에서 왔다. 이제 나는 어쩌다 캐나다에 떨어져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카지노 게임는 캐나다까지 와서도 여전히 너무나 씩씩하다. 카지노 게임에게도 '나 혼자는 못하지.' 하며 조금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시간이 올까. 조금 덜 강해져도 괜찮은 그런 시간.
캐나다에 온 지 세 달째 되던 날, 카지노 게임가 한국으로 떠났다. 카지노 게임는 캐나다 우리 집에서도 세 달 동안 수를 놓았다. 하얀색 큰 천에 오목조목 그림과 글씨를 한 땀 한 땀 새겼다. 카지노 게임가 수놓은 커다란 천은우리 집 부엌에 걸렸다. 문득 그곳에 눈길이 머무를 때면 어릴 적 카지노 게임의 시간이 떠오른다. 안경을 쓴 채 가만히 앉아 손만 가만가만 움직이던 모습. 수를 놓으며 카지노 게임가 혼자 보낸 시간들.
"와! 할미는 수 전문가야!"
외할머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큰 딸이 감탄한다. 직접 수놓은 빨간 머리 앤 얼굴이 사진 속에 있었다. 딸들은 손 끝에서 예쁜 그림을 척척 만들어내는 할머니가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할머니가 자기 이름을 새겨 주고 간 피아노 커버까지 새삼 다시 꺼내보며 야단이다. 나도 내 딸처럼 아무 꼬인 마음 없이 멋지다고 칭찬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잘 안된다. 혹시 또 혼자여서 버거운 날이 있었는지, 또 씩씩하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었는지걱정스럽다.
그러나 이제 그런 불편한 생각은 내려놓기로 한다. 수 전문가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처럼 나도 씩씩하게 홀로 서 있는 카지노 게임를 자랑스러워하기로 한다.카지노 게임가 수놓은 빨간 머리 앤처럼 '우리 인생은 너무 짧아!' 하며 또 씩씩하게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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