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팔 상부에 네 번째 타투를 올렸다. 마지막 타투를 하고 꼬박 삼 년 만이었다. 올 초, 남편에게 새로운 타투를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많이 했으니 그만하라고 했다. 남편에게 타투를 반려당하고 몇 달 후, '카지노 쿠폰'을 새기고 싶다고 하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고심 끝에 결정한 내용을 전달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수용해 줄지 몰랐다. 생각해 보니 카지노 쿠폰 형태의 펜, 볼펜, 커터칼, 자, 연필깎이, 형광펜, 필통, 키링, 우산 등을 비롯하여 카지노 쿠폰이 그려진 안경닦이, 동화책 등 직접 사고 선물 받은 카지노 쿠폰 굿즈가 수납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카지노 쿠폰 덕후인 나를 아는 사람이니 더 이상의 설득은 빠르게 포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카지노 쿠폰에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카지노 쿠폰은 나의 닉네임을 보조하기 위한 수식어로 쓰던 '카지노 쿠폰녀'에서 '캐로티'라는 온전한 닉네임으로 진화한 형태다. 20대 초반, 나는 싸이월드에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당시 내가 쓰던 닉네임은 '꼬맹이영'이었다. 이는 20대의 절반을 함께 한 남자친구가 나를 '꼬맹이'라고 부르고, 내 이름 끝 글자인 '영'을 따서 조합해 만든 닉네임이었다. 그 닉네임의 수식어가 '카지노 쿠폰녀'였다. 그렇게 '카지노 쿠폰녀, 꼬맹이영'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했었는데,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느덧 2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스스로 '안녕하세요? 꼬맹이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남자친구와 함께 '꼬맹이영'을 떠나보내고 '카지노 쿠폰녀'만이 내 곁에 남았는데, 닉네임으로 쓰기에 썩 내키지 않아서 새로운 닉네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지노 쿠폰녀의 카지노 쿠폰이 의미하는 바는 채소가 아닌 '카지노 쿠폰과 채찍'에서의 카지노 쿠폰, 그러니까 긍정적 보상을 의미했다. 어릴 때, 아빠는 '아유, 우리 선영이는 전복 내장도 먹을 줄 알아요.'이러면서 어른들 앞에서 칭찬을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괴상하게 생긴 것도 용기를 내어 먹곤 했다. 이처럼 나는 칭찬을 들으면 상대방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노력하곤 했다. ‘카지노 쿠폰과 채찍’에서 유독 카지노 쿠폰에 집착했는데, 좋은 대학은 못 간 것을 보면 이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20살이 넘어서 깨달은 것 같다.
그렇게 고심 끝에 카지노 쿠폰(carrot)에 접미사(-y)를 붙여 '캐로티'라는 닉네임을 만들었다. 이 닉네임으로 블로그, 인스타, 브런치까지 운영 중에 있고 '캐로티'라는 닉네임으로 만난 사람에게 나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스스로에게 긍정적 보상을 주고자 시작했던 카지노 쿠폰은 회사를 벗어나면 글 쓰는 사람이라는 나를 상기시켜 주는 하나의 채찍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회사 출퇴근길에 메모장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고, 블로그에 내용을 (비공개로) 정리하고 브런치에 담아낸다.
최근에 정신과 상담을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요즘은 글 안 쓰세요?'하고 물어봤다. 그래도 최근에 부쩍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터라 편안한 얼굴로 '요즘은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20일 내내 매일 발행하다가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20일 연속 연재(남편에게는 비밀입니다)하고 약 2주 정도 쉴 때가 정말 힘들었는데, 그때는 ’내가 죽어야 끝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가 유독 힘들어서 그랬던걸 수도 있고, 아니면 글을 쓰지 않아서 그랬던 건지 잘 모르겠어요. 우연히 그 시기가 겹쳐서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가 아니라 '아, 이건 내가 죽어야 끝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더라고요."
선생님은 내가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토해내고(정확히는 배설이라는 단어를 썼다) 치유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첫 책을 출간했을 때, 내가 정한 주제를 듣곤 '치유의 글쓰기를 하시는군요. 정말 좋은 선택을 하셨네요.'라고 말해줬을 정도다. 이제 내게 글쓰기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카지노 쿠폰이자 채찍이 된 셈이다.
카지노 쿠폰을 타투로 하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카지노 쿠폰의 꽃말이 '죽음도 아깝지 않으리'라고 한다. 결혼 직후 자궁 외 임신으로 유산하고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갑자기 아빠를 떠나보낸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 공황장애를 진단받았다. 그렇게 5년을 수면아래에 있다가 이제야 슬그머니 육지로 올라와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것은 지금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 하나 아깝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나는 수년의 시간을 거쳐 '캐로티'가 된 것 같다.
왼쪽팔 상부, 그러니까 왼쪽 가슴 바로 옆에 새겨진 카지노 쿠폰을 보면서 나는 계속 상기할 것이다. 내가 이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내가 살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하는 것. 그리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이 글을 읽어 주는 분들에 대해 감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