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구토 2024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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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Jan 29. 2025

너라는 존재 #2

6.

꿈을 꾼다. 시골집 앞에 홀로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는 불에 타서 거대한 숯덩이처럼 보인다. 생명력을 빼앗긴 그 검은 나무 가지들은 마른바람에 흔들려 곧 부러지기라도 할 듯 휘청대며 볼품없는 실루엣을 드러낸다. 나무 밑에는 누군가 땅을 파놓았다. 사람 한 명이 눕기 좋은 크기의 구덩이다. 나는 그 구덩이 쪽으로 다가가서 쪼그려 앉아 그 구덩이를 유심히 살펴본다. 구덩이에는 불에 타버린 나무의 뿌리가 아직 그 힘을 잃지 않았는지 그악스럽게 대지를 움켜쥐고 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확연하고 섬뜩한 색의 대비. 검은색의 나무뿌리와 대비되는 하얀색의 꿈틀대는 그 무엇들. 그것은 구더기처럼 생긴 하얀 벌레들이다. 그것들은 하얗게 번들거리는 기름진 피부를 꿈틀대며 나무의 뿌리 쪽을 향해서 기어올라가고 있다. 검은 뿌리에 안착하기라도 하면 짙고 거센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라도 하는지 그것들은 계속해서 검은 뿌리 쪽을 향해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들이 도착할 곳은 그 검은 나무의 뿌리인 것이다. 그것들이 나무뿌리에 닿았을 때 나는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내 시야에는 내 복부가 보이고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한 것처럼 거대하게 보인다. 내 맨들 거리는 피부에 구덩이 안에 있던 하얀 벌레들이 꿈틀대며 배꼽으로 파고들고 있다. 마치 그곳이 자신들의 목적지인 것처럼. 나는 손으로 그 끔찍한 벌레들을 털어내려고 버둥대며 안간힘을 쓴다. 그때귓가에서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오빠.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다고. 일주일에 두세 번이나 반복되는 지독한 꿈이다. 나는 언제부터 이 꿈을 꾸게 되었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여동생의 목소리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동생은 청각 장애인이었다.


7.

잠에서 깼지만 이빌어먹을 꿈이 아직 의식의 벽에서 달아나지 않았기에 나는 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묵직하게 내려앉은 회색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방안은 차가워 보이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으로 물들어있고 창밖에서는 지난밤의 적요가 새벽공기의 진공 속으로 서서히 함몰하고 있었다. 내 의식은 금속성의 침전물처럼 무겁게 내려앉기만을 반복하는 듯했다. 그렇게 혼탁한 의식 속에서 불현듯 며칠 전에 보았던 불길한 여자가 머릿속을 흔들었다. 커다란 선글라스 뒤에 감춰진 음흉한 눈빛은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일까. 문득 여동생이 내 곁에 있었다면 그녀와 비슷한 나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하나뿐인 동생. 메마른 가슴에 통증처럼 퍼져나가는 그 호칭은 너무나 아득했다. 은닉된 삶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며 세월의 질서 속에서 망각의 먼지를 털어내 준 것은 어쩌면 선글라스를 낀 그녀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들에 잠겨있을 동안 잠들어있던 도시는 어둠의 여백을 벗어던지고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사물들의 윤곽을 그려내기 시작했다.줄기처럼 뻗어있는 골목과 거리에는 혈액이돌 듯 사람들의 발길소리와 지나다니는 차량들의 배기음 소리가 각기 다른 목적지를 향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출근준비를 하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욕실에 들어가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가르마 사이로 세월의 표백漂白을 증명하듯 흰 머리칼이 몇 가닥 보였다. 흰머리를 뽑기 위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을 때 왼쪽 손목에 가로로 그어진 네 줄의 상흔이 보였다. 나는 지나간 시간을 꿰매어버린 그 흉터를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8.

사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네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라서 가끔은 걸어서 출근했지만 오늘은 버스를 타기로 했다. 이른 아침이라 버스에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버스에 올라타서 손잡이를 잡는 순간 많은 시선들이 내 왼쪽 손목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네 개의 검붉은 선. 그것들의 길이는 각기 달라서 침착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리길이가 맞지 않는 탁자처럼 불안하고 볼품없었다. 실패한 자살의 흔적은 타인의 불륜을 보는 것과 같았다. 순식간에 모두의 관심을 받지만 동시에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사람들은 곧 내 손목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정거장이 지났을 때 도로는 정체되고 있었다. 앞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버스 안은 사람들의 불평불만으로 가득해지면서 아침의 상쾌한 얼굴을 짓고 있던 공기가 불쾌하고 일그러진 공기로 변모되었다. 나는 창밖으로 정체된 도로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가 서서히 풀리면서 버스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했을 때 정류장에서 선글라스를 낀 그녀가 보였다. 며칠 전에 본 그녀와 동일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았으나 기묘할 정도로 큰 선글라스가 나쁜 기억의 섬광처럼 내 시야에서 번쩍였다. 나는 그녀와 마주치기 위해서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출근길의 많은 인파를 허우적대면서 나는 선글라스의 그녀에게 다가갔고 내 걸음은 그녀의 발끝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며칠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며칠 전에 그 사거리에서. 맞죠? 그녀는 치아를 보이지 않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 렌즈가 너무 짙어서 도통 그녀의 눈을 볼 수가 없었지만 가까이서 본 그녀는 왠지 모르게 세월 속에 묻힌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서 배어 나오는 희미한 땀냄새와호기심과 미열로 촉촉하게 젖은 몇 가닥의 머리칼은 시간에게서 잊혀진 어떤 공간을 연상케 했다.나는 그녀를 마주하고 잃어버렸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9.

여동생이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소리는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말이었다. 수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탓에 공책에 연필로 또박또박 적어 넣은 글씨로 이야기했다.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주 많이라는 것은 아마도 우리 남매에게만 허용된 수사일 테지만.아버지는 밖에서 무얼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곤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들은 왜 빈곤한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 집은 냉난방이 안 되는 집이었는데 겨울철만 되면 여동생과 나는 꽁꽁 얼어버린 몸을 녹이기 위해서 생존을 위한 가벼운 불장난을 했다. 방 안에 업소용 식용유가 담겨있던 빈 양철통을 가져다 놓고 그 안에 길거리에서 주워온 신문지나 버려진 박스들을 주워 모아서 아버지의 라이터를 몰래 훔쳐다가 불을 피우며 몸을 녹였던 것인데, 차가운 온돌방에 두꺼운 담요를 뒤집어쓰고 불장난을 하고 있으면 생각보다 몸이 쉽게 데워지곤 했다. 가끔 나는 여동생에게 내가 어른이 되면 뭘 했으면 좋겠어라는 질문을 했었는데그때마다 동생은 오빠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고 노트에 썼다.나는 그 노트에 적힌 글자를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조금씩 조각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을 피울 때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영하의 날씨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놔야만 하는 단점이 있었는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늦은 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서는 집안에 남아있는 매캐한 냄새와 탁한 공기를 들이쉬고는 자신이 피워대는 담배연기로 착각한 모양인지 우리 남매를 향한 거친 욕설과 함께 그대로 자신의 이부자리에 곯아떨어졌다.


10.

우리 집 마당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었다. 깊이가 3미터쯤 되는 그렇게 깊지도 않고 폭도 넓지 않은 작은 우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동네에 심각한 가뭄이 지나가고 나서는 우물 안에 물은 모두 메말라버려서 텅 빈 공동처럼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 여동생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여동생은 자주 그 우물 안에 자신의 작은 몸을 숨겼다. 그래서 나는 동네에서 밧줄 몇 개를 주워다가 간이 사다리를 만들어서 우물 입구에 고정시켰다. 깊이가 그렇게 깊지 않아서 사다리도 길게 만들 필요는 없었고 만약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밧줄이 끊어진다고 해도 깊지 않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동생은 내가 만든 밧줄 덕분에 안전하게 우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끔 나는 동생을 더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일부러 여동생을 못 찾는 시늉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문장을 마당이 떠나갈 정도로 한 음절씩 크게 외쳤다. 그럴 때면동생은 밧줄 사다리를 타고 우물 밖으로 나와서 석류알 같은 작은 치아를 보이면서 소리 없이 배시시 웃었다. 동생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게 꼭꼭 잘 숨은 자신이 자랑스러워서 웃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빠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어설픈 밧줄 사다리가 좋아서 웃었던 것일까. 그 어린 나이에 자신에 대한 옹호와 오빠에 대한 승인이 만들어 낸 미소는 내 마음을 속절없이 슬프게 했다.나는 동생의 웃음 앞에서 상처 입은 맨살처럼 한없이 여린 소년이었고 또 유일하게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였다. 아버지를 포함한 이 세계에 속한 모든 이들은 우리들이 지내는 작은 세계를 온전히 지켜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모든 언어를 상실한 그녀의 세계에서 나는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언어이자 그녀가 채집하는 의지였다.나는 평생 그녀의 작은 손에 쥐어진 포충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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