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걸음씩 Jan 14. 2025

카지노 게임 싸기 금지입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은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여러 번 재시청할 정도로 재미있는데,그중 카지노 게임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대학입시 시험이 있는 날 아침,집을 나서는 아들(정준하)에게 엄마(나문희)는 카지노 게임을 가방에 넣어주며 '오늘은 시험이니까 특별 메뉴로 쌌다'라고 말을 한다.

아뿔싸! 엄마는 아직도 아들을 제대로모르는 모양이지. 그런 말을 하다니.

정준하는 시험 보는 내내 '특별메뉴? 아, 궁금해. 특별메뉴가 뭘까?' 하면서 시험에 집중을 못하다가, 급기야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시험 도중 가방을 뒤져 카지노 게임을 열어보는 사고를 친다.

시험장은 정준하의 부정행위로 발칵 뒤집혔는데 그 와중에 '아, 불고기구나'하며 안도의 표정을 짓는 정준하의 얼굴이 클로우즈업 되며 끝난다.

카지노 게임 메뉴가 궁금해서 대학입학시험을 망쳤다는 설정이 엉뚱하지만 식탐이 지나친 정준하의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딸은 특별히 좋아하는 메뉴를 싸 준 날에 메시지를 보낸다.


'나 지금 정준하 됐어. 점심시간 언제 오는 거야? 카지노 게임 열고 싶어 미치겠는데'


웃기기도 하지만 카지노 게임에 대한 칭찬으로 해석한 나는 '내일은 또 뭘 싸줄까'를 궁리하며 창조적 뇌가 활성화된다.

딸은 밥통과 반찬통이 따로 있는 번거로운 카지노 게임보다 한 그릇에 는 일본식 덮밥 카지노 게임을 좋아한다.

먹기도 편하거니와 적당하게 간이 된 밥이 오히려 맛있다고 한다.

나도 편하다. 반찬이 조금만 있어도 되고, 설거지도 간단하니 마다할 리 없다.


자꾸 남편과 비교를 해서 좀 미안하긴 한데 남편은 식성이 까다롭다.

까다롭다는 기준은 적게 먹으면서 이것저것 가린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는 편식이 심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신혼 초 '얘는 정말 식성이 좋단다. 된장만 있으면 밥을 먹는 애야.'라는 말로 적어도 식성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일이 없음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그 말엔 함정이 있었다.

'된장만'이라고 하셨지만, '된장이 없으면'이라는 가정을 빠뜨리신 것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은 많지 않다.

고등어요리, 된장짜글이 (국이나 찌개는 안 좋아함), 고추장, 두부, 돼지고기 김치찌개등이다.

남편을 위해 매일 같은 반찬을 할 수도 없는 것이,좋아하는 반찬이라고 해도 여러 날 나오면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려 내도 자기가 즐겨 먹는 반찬이 없으면, 그냥 고추장에 슥슥 비벼 먹거나 물에 말아먹는 행동으로 불만을 드러낸다.

의도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난 이건 맛없어. 고추장이나 물이 더 낫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행동을 보며, 반찬에 대한 나만의 확고한 기준이 생겼다.

남편을 위한 밥상을 차리든가, 아니면 남편식성 무시하고 아이들만의 메뉴를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차린 밥상으로 통계를 낸다면 전자반, 후자반 정도일 것이다.(물론 내 생각이다)


남편은 가끔 외식을 하면 집에 와서,다시 밥을 먹는다거나 라면을 끓여 먹어야 식사가 끝난다.

주부가 외식을 좋아하는 이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식사준비나 설거지의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남편처럼 다시 식사를 한다면 굳이 외식을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요즘은 거의 안 한다.

남편 밥은 따로 해놓고 나와 아이들만 나가서 먹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외식은 없다.

남편이 어머니의 된장짜글이를 좋아하듯, 딸은 내가 해주는 모든 음식에 대해 항상 엄지 척이다.

원래 누구나 엄마 밥은 맛있으니까.


딸의 카지노 게임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재미있고 즐겁다.

무슨 재료든 한주먹만큼만 있으면 맛깔나고 먹음직하게 덮밥 카지노 게임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나에게 있다.

다이어트하느라 소식을 하다 보니 딸의 밥주머니는 절반정도로 줄었는지 먹는 양이 많지 않아서 카지노 게임을 싸는데 부담이 없다.

뭘 싸줘도 맛있게 먹는 딸은 의외로 밖에서 먹는 음식엔 점수가 야박한 편이다.

'이건 엄마가 한 게 훨씬 맛있네'라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마치 흑백요리사에 출전하여 칭찬받은 요리사처럼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아침을 안 먹는 딸을 위해 과일도 조금씩 싸주는데, 며칠 전 그걸 본 남편이 자기도 싸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공사 현장에서 혼자 과일조각 몇 개를 꺼내놓고 먹는 게 가당키나 해?

무슨 생각으로 싸달라고 한 거지?

그때 빈말로라도 '그럴까?' 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돼? 됐어!'라고 단칼에 잘라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남편도 카지노 게임이 그리웠는지모르는데...


딸은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되었다.

아직 결혼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이성교제에 대해서도 관심 없다.

집에서 너무 편하게 해 주니까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내가 남편과 자주 싸우는 걸 보고 자란때문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이는 문제는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딸문제로 상담하던 과정에 카지노 게임을 싸주지 말라는 생뚱맞은 처방을 받았다.

내가 말한 것 중에 어느 이야기가 카지노 게임과 연관이 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점심값이 너무 비싸서요.'

'대충 사 먹으려고 하면 매번 컵라면만 먹게 될 거예요. 그럼 건강도...'

'갑자기 안 싸준다고 하면 많이 실망할 거예요.'


처방을 거절하려고 여러 가지 이유를 댔더니 '그러면 알아서 하라'며 포기한듯 대답했다.

카지노 게임 처방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초등학생도 아닌 서른네 살의 딸에게 카지노 게임을 싸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내 마음은 마치 자식을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입양 보내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무기력해져서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무슨 낙으로 살지...

몇 시간을 그대로 누워 있다가 저녁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귀가한 딸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내가 카지노 게임을 싸주지 않으면 나름대로 점심을 해결할 자구책을 찾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도, 내 생각엔 딸이 끼니 해결도 못하고 컵라면등으로 때울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라면으로 점심 해결을 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딸의 경우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처럼 여겨졌다.

여전히 나에게 딸은 어린이집에 다니던 그때 그 아이처럼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제야 왜 나에게 '카지노 게임 싸기 금지'의 극약처방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딸에게 싸주는 카지노 게임은 보통의 가정에서 있는 평범한 엄마표 카지노 게임이 아니었다.

딸과 나의 관계가 끈끈한 모녀지간을 넘어 어딘가 문제가 있음을 카지노 게임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


휴가가 되면 당연한 듯 딸과 계획을 짰고, 가끔 친정언니를 추가하는 정도였다.

딸도 나도 각자 친구들과 여행을 가보고 나서 '역시 우리 둘만큼 서로에게 편한 여행파트너는 없다'며,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은 역시 동반자가 중요하다고 했다.

적어도 1년에 2번 정도는 딸과 여행을 했고, 준비과정의 호흡도 아주 잘 맞는 데다가 내가 계획을 세우면 딸은 항상 만족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딸과 친구처럼 함께 여행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니...

딸과 있었던 시간들을 통째로 부정해야 하는 것일까.

머릿속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카지노 게임만 안 싼다고 해결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딸을 불러 앞으로 카지노 게임을 싸지 못할 것 같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 갑자기 왜 그러는데? 누가 뭐라고 한 거야? 그럼 나 점심 어쩌라고?'

딸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다.

직접 자기 입으로 점심 걱정하는 말을 들으니, 나는 밥도 못 먹는 오지로 딸을 입양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이런저런 변명을 어색하게 둘러 대며 단박에 행동으로 옮기면 타격이 될 듯하여, 다음 달부터 그리하겠다고 했다.

나도 카지노 게임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마음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카지노 게임 그게 뭐라고 이렇게 마음을 슬프고 우울하게 하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처방이고 뭐고 그냥 접어두고 카지노 게임을 계속 싸주겠다고 말을 바꿀까?

내 속은 이랬다 저랬다 정신없이 생각이 오갔고,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머리로는 이러니까 처방이 필요한 거구나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나에게 힘든 일도 아니고 딸도 좋아하는 걸 굳이 끊어야 하나 싶었다.

내가 아침마다 카지노 게임 싸는 것에 대해 말했던 내 지인들과 딸 회사 동료들의 말이 한꺼번에 스쳐갔다.


'매일 아침카지노 게임을 싸주는게대단하다.

내 주변에 그런 엄마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


'카지노 게임 싸주는 엄마가 있어서 부러워요.

카지노 게임을 보니 엄마한테 정말 사랑받는 딸 같아요.

꼬맹이들 카지노 게임처럼 재미있어요.'


그때는 칭찬으로 들었던 말들이 '뭔가 문제 있다는 거 알고 있지?' 하는것 같았다.

내 마음은 극과 극을 오가며 사나흘을 끙끙 앓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