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나와 많이 달랐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미팅도 나갔었고, 교회 고등부에도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졸업 후 직장에 다닐 때도 썸남이 항상 있었고, 내가 썸녀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친구라고 정해놓고 사귄 적은 없었다.
그런데 딸은 남사친이라고 생각했다가도, 상대가 호감을 보이면 바로 잘라내며 남자로서 다가올 수 있는 틈을 전혀 내어주지 않았다.
연예인 말고 좋아하는 남자가 있기는 했냐고 내가 물어볼 정도였다.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 '마음이 안 생기는데 어쩌겠냐'라고 말하는 딸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나의 학창시절은 색으로 표현하면 연한 회색빛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 않았지만 딱히 행복하거나 즐겁지도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한 약속이 있었다.
졸업후 취직하면 함께 방을 구해 집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그 해 가을, 친구는 기숙사가 있는 대형 호텔에 취직해서 내 곁을 떠났고, 경우야 어떻든 집에서 벗어난 그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약속 따위는...
그 후에 나도 취직을 했고 돈이 모아지면 집을 나가겠다며 가슴속에 희망카드를 넣고 살았지만, 잦은 이직과 반복되는 실직으로 희망카드의 존재 마저 까마득해졌다.
집에서 나가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외도가 시작되었을 무렵,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학교 축구부를 담당하던 코치였는데,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덩치가 산만큼이나 크게 느껴지던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기분 내키는대로 아이들의 가슴을 움켜잡고 번쩍 들어올려서 교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매달린 아이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선생님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친구들을 칠판 앞으로 불러서 일렬로 세워놓고 발길질로 한 명씩 넘어뜨렸다.
일어나면 다시 넘어뜨리기를 반복했는데, 나는 넘어지는 것도 무서웠지만 친구들 앞에서 당하는 수치심으로 인해 땅 밑으로 꺼져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엄마에게 육성회비 이야기를 하면 항상 '엄마는 돈이 없으니 아빠한테 말을 하라'라고 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집에 오신 날 아침, 육성회비를 가져가야 한다고 했더니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다음에'라고 잘라서 말했다.
다시 나가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아빠의 '다음에'라는 기한 없는 약속을 기다리려면, 선생님의 발길질과 친구들의 눈빛을 또 견뎌야 하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학교에 가지 않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불같이 화를 내며 내 머리를 내리 쳤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게 맞는 순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뭔가 번쩍 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코에서 몹시 매운 공기가 느껴져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모습은 많이 낯설었고, 당황스러웠고, 무서웠고, 세상의 부정적인 단어는 다 끌어다 모아도 모자란다.
그 후로 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게 되었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온몸이 경직되는 것처럼 행동이 불편해졌다.
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오직 인사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물음에 대한 나의 단답형 대답. 그뿐이었다.
외도녀와 살림을 차리면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가출한 사건은 나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공포의 대상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없는 집이라니...
엄마는 그 일로 한동안 정신이 나가 조현병 증세를 보이기도 했고, 음독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엄마 때문에 내 마음이 아파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돌아오는 건 너무 싫었다.
가끔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오는 날, 온라인 카지노 게임와 한 공간에 있으면 온몸이 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마치 주사를 맞기 위해 줄을 서서 점점 차례가 다가올 때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이 계속 유지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왔다.
방어기제였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운다고 맞았는데 설마...
'넌 왜 부르기만 하면 우느냐'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불러서 우는 것이 아니고 부르기도 전에 계속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외도녀와 사는 집이 집에서 이십분정도 거리였는데, 가깝기는 해도 외도녀의 시기와 질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집에 잘 오지 않으셨으므로 심리적 거리는 십리도 더 되었다.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명절, 제삿날, 당신 생신, 방학식날.
명절엔 어차피 집에 오셨다가 옷을 갈아입고 큰댁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셨다가, 바로 외도녀의 살림집으로 가셨기에 별로 상관없었다.
생신 때는 고모들도 집에 왔었는데, 고모들과 함께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잔뜩 술에 취했고, 바로 다음날 일찍 다시 나가셨기에 우리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다만 방학식날집에 오실 때는 항상 회초리를 준비해서 오셨다.
'성적표 갖고 와봐라!'
그 한마디에 일사불란 책가방에서 성적표를 꺼내오는 우리 남매들.
줄줄이 무릎 꿇려 앉힌 후 손바닥을 때리셨는데, 내 차례가 다가오면 매타작이 끝난 후로 순간이동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끔찍했다.
일 년에 두 번인 방학식날만 잘 참아내면 나름대로 우리 집은 평온했다.
평온이 깨진 것은 장남인 오빠의 사춘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비교적 조용했다고 부모님들은 오빠의 사춘기를 표현하지만, 좌충우돌처럼 변한 성격은 고스란히 우리가 받아냈다.
외도로 부재중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 실질적 가장으로 일하느라 집을 비운 엄마는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지 못했다.
멍이 들거나 어디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빠는 나에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와 맞먹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어,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가끔 집을 떠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이었다.
물론 오빠와 좋은 추억도 많다.
가끔 시간이 날 때 옥상에 올라가 오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던 행복한 기억도 있고, 오빠의 주도로 함께 캠핑을 간 적도 있었다.
혼자 대학 다닌 것이 미안해서 축제기간에는 우리를 번갈아가며 학교에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줬다.
오빠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빈자리를 자기가 채워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젊음을 즐기지 못했고, 오빠의 책임감은 나에게 두려움이었다.
비교적 좋은 때도 있었지만 오빠가 화를 낼까 봐 긴장하는 마음은 항상 내 마음에 낮게 깔려있었다.
매일화를 내는 것보다 언제 화낼지 몰라 긴장하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취직한 후에도 늦게 귀가하는 날에는 오빠가 잠든 후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엄마가 있을 때 들어갔다.
효자인 오빠는 엄마 앞에서는 절대 우리에게 손대지 않았으니까.
내가 결혼하고 나서 오빠는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내 방을 바라보고 울었다고 했다.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나와 보호자라고 자처한 오빠가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결혼 후 2년가량 전업주부로 살았는데 그때 나의 정체성은 주부였다.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가치가 없다고 느껴졌다.
연년생의 딸과 아들에 대한 독박육아도 나에게는 당연했고, 남편이 주방에 들어와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속으로 짜증이 났다.
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랄까.
남편이 망하고 나서 내가 직업을 갖게 될 때 남편은 필사적으로 말렸는데, 지금은 조금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어쩌면 남편도 돈 버는 것이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은 잔소리할 때 가끔 '여자가 말이야'라는 말을 할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말이 육두문자보다 더 듣기 싫었다.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좀 하지 말라고 하기 보다는 남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내가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가정에 더 소홀해졌고, 그때부터 나는 집안 살림을 하는 주부가 아닌 나 자신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남편의 입에서 '여자가'라는 단어는 나의 분노버튼이자 발작버튼이 되어 부부싸움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전개됐다.
어디 한번 따져보자며 살림하는 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인 나의 일이라면,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건 남편의 몫인데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거냐고.
어디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 운운하는거냐며 소리를 지르고 덤벼들었다.
나중에는 가정의 경제적 기여도를 따져가면서 남편의 자존심을 긁어댔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자와 맞짱을 뜨게 된 대상이 남편이었다.
오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기억나는 부부싸움이 있다.
몇년전 일이다.
남편은 스스로 밥을 차려 먹을 때는 반찬 그릇 정리를 하는데, 내가 차려주면 그대로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난다.
한 번은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밥을 차려주고 방에 들어가서 할 일을 하다가 나왔는데, 반찬그릇을 정리하던 남편이 갑자기 멈추고 TV앞으로 갔다.
나는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치우다 말고 가? 마저 치우지."
"이건 네 일이잖아."
"뭐? 이게 왜 내일이야!! 먹는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지금 생각해도 그건 정말 남편의 치명적 말실수였다.
아마 자기도 해놓고 아차 싶었을 것 같다.
방에서 듣던 딸도 아빠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차려준 밥을 먹는 것은 자기 일이고 먹고 난 자리를 치우는 것이 내 일이라고?
내가 부담하는 생활비가 자기보다 훨씬 많은데?
나는 마치 그 순간이 오길 기다렸던 사람처럼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 난리 생난리를 쳤다.
내가 지금까지 싸웠던 중 가장 강력한 샤우팅이었다.
미안하다고 해도 내 화가 가라앉지 않았을 텐데남편은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럼 너도 하지 마. 누가 밥 차려 달랬어? 생색은."
"내가 안하면 누가해! 이집에서 누가 도와주는 사람 있어? 들어오면 누워서 잠만 자면서."
"야, 하지마 하지마. 하지말고 너도 누워서 자."
"그래? 말 잘했어. 누구든지 앞으로 나한테 밥 얻어먹을 생각 하지 마!"
사실 그때 겉으로는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야호를 불렀다.
휴일마다 아침 일찍밥 달라고 깨우는것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는데,벗어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쾌거가 아닌가.
그 후로 지금까지 식사준비는 '내가 하고 싶을 때'라는 원칙이 생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족들을 굶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밥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반찬투정을 하지도 못한다.
딸은 어디서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
직장에서도 18리터의 커다란 생수통을 자신이 교체한다고 했다.
가끔 남자직원이 '그 무거운걸 왜 직접 하세요. 남자들이 있는데.'라고 말하면 '저도 할 수 있어요!' 하며 절대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
공주병 환자처럼 '못해요'를 만발하는 것보다 낫지.
나와 좀 다른 딸의 모습이 가끔 부럽기도 했는데, 얼마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물었다.
"너 혹시, 남자가 무시되고, 남자한테 지기 싫고 막 그래?"
"왜?"
"아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근본적으로 남자가 싫은건가 하고."
"그래 보여?"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게 좀 수상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굴 닮아 저럴까?
그렇다고 딱히 가르친 적도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내 모습과 딸의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러나는 모양만 다르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말이야'에 버럭 화를 냈던 것이 성차별이라고 느꼈기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업주부로 있을 때는 환경이 어쩔수 없으니 나의 영역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려 했고,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는 남편과의 동등함을 주장하며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주방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었다.
나와 딸이 모양만 다르지 여성이라고 다르게 대하는 것에 반감이 생기는 것은 같았다.
딸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라고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라고 차별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것일까.
나에게 남자의 상징은 '힘'이었다.
어릴때 학교 선생님이 그랬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와 오빠가 그랬다.
그들의 힘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나를 공격하는 가공할 무기였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이런것이었구나...
남편은 한번도 나를 때린적이 없지만, 남편과 단 둘이 있을때는 혹시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싸우지 않고 참았다.
항상 누군가가 있을때 나는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화를 냈다.
남자=힘=폭력
이런 등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고, 온몸으로 표현되는 메시지를 딸이 그대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닮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