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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k Back of Time Apr 27. 2025

플레이아데스의 카지노 게임 (3)

단편소설

플레이아데스의 카지노 게임 (3)



카지노 게임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호주에 있는 딸이 떠올랐다. 야채김밥을 좋아하던 내 딸. 이 아빠가 보고 싶지 않을까. 미소를 지으며 카지노 게임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카지노 게임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김밥만 열심히 먹었다. 잠시 뒤 엉뚱한 말을 했다.


내 이름은 미망, 하고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카지노 게임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묻지도 않은 이름을 말하다니. 게다가 미망이라니! 희한한 이름이었다. 카지노 게임는 다시 김밥을 차근차근 먹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미망이라는 이름은 이상했다. 그런 이름이 우리나라에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너무 어색했다.


미망? 그건 미망(迷妄)이라는 한자어로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런데 다른 한자어 미망(未忘)을 적용하면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이라는 뜻이 되었다.새삼 카지노 게임의 얼굴이 혼돈스럽고 동시에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국적인 구석도 엿보였다. 어쩌면 혼혈아일지도 몰랐다. 카지노 게임는 계속 김밥에 열중했다. 어느새 세 줄이나 먹었다. 나는 유리컵에 물을 따라 카지노 게임에게 건넸다.


이름이 진짜 미망이니?


응? 아, 아니야, 여기 온 첫날 어떤 애들이 그렇게 불렀어. 내가 미련한 망아지여서 미망이래.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군가 카지노 게임의 당돌한 행동과 유치한 말투를 두고 놀린 것 같았다. 가게 종업원이 다가와 그릇을 치워도 되냐고 물었다. 카지노 게임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업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은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종업원은 나와 카지노 게임를 번갈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이 불편했다. 카지노 게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맛있다. 잘 먹었어, 하며 맑게 웃었다. 카지노 게임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다시 보니 열다섯 살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얼굴이었다.


나는 카지노 게임에게 집이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카지노 게임는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자신의 검정 숄더백을 뒤적거렸다. 나무상자 하나를 꺼냈다.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15센티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나무상자 윗부분에는 구멍이 세 개 뚫려 있었다. 십 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작은 구멍이었다. 카지노 게임는 나무상자를 테이블 위에 탁 올렸다. 그러곤 숄더백에서 세 개의 비닐 빨대를 꺼내어 나무상자 구멍 안에 하나씩 꽂아 세웠다. 손가락으로 빨간색과 초록색 빨대를 고정하고 노란색 빨대를 이리저리 만졌다. 나는 카지노 게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무슨 의도인지 이해되질 않았다. 이윽고 카지노 게임가 세 개의 빨대를 균형 있게 고정했다. 이제 됐다, 하며 활짝 웃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니?


이건 라디오.


라디오?


응, 이건 라디오야. 그리고 이건 안테나. 귀 기울이면 소리가 들려.


오늘은 아무래도 내 머리 위에 물음표가 가득 떠오르는 날인 것 같았다. 카지노 게임는 얼굴을 나무상자에 가까이 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나도 몸을 약간 앞으로 움직여 상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내가 뭐 하는 거지? 카지노 게임에게 맞장구치다니.


나는 나무상자를 조심스레 살폈다. 빨대가 꽂힌 구멍을 통해 엿보이는 상자 속은 텅 빈 것 같았다. 장난인가? 하지만 카지노 게임의 순진한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나는 홀연 무엇에 홀린 듯 나무상자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린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잠잠했다. 무슨 소리가 들리니?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카지노 게임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쉬 하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펭귄 마스코트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 두 명이 카지노 게임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속삭이며 뭔가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치한 짓을 하다가 들킨 느낌이었다.나는 앗, 하고 놀랐다. 나지막한 음파가 다시 귓가에 스쳤기 때문이다. 아득한 파도 소리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바싹 기울였다. 카지노 게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는 식당 주방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확인할 틈도 없이 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무상자 라디오는 고요해졌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지노 게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지노 게임는 두 손으로 나무상자를 감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연락되었어. 한 시간 뒤에 그들이 여기 도착할 예정이야.


그들이 누군데?


누구긴. 날 데려갈 사람들이지. 엄마가 보낸 기사들. 우리 엄마는 여왕이야.


여왕?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철없는 카지노 게임에게 상처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왕 엄마가 지금 어디에 있냐고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카지노 게임가 눈썹을 올렸다.


어디 있긴, 저쪽 먼, 내 나라 별에 엄마가 있지.


아무래도 카지노 게임의 정신연령이 낮은 게 분명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지도 몰랐다. 외모는 중학생인데, 말투는 여전히 다섯 살 된 여자애였다. 하지만 어색한 말투도 자꾸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어쨌든 카지노 게임는 자신이 지구를 방문한 외계 별나라 공주라고 주장하는 거였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카지노 게임에게 고향별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카지노 게임는 머뭇하더니 나무상자의 초록색 빨대를 잠깐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였다. 자기 고향 이름을 알려주겠다고 덧붙였다. 카지노 게임의 라디오는 마치 인터넷처럼 지식검색도 가능한 것 같았다. 참았던 웃음이 나왔다.


카지노 게임는 라디오에 귀 기울인 채 진지하게 몰두했다. 내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카지노 게임는 침묵 속에서 뭔가를 듣는 것처럼 보였다. 카지노 게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크게 뜨고 아이 같은 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고향 별을 플레이아데스성단이라고 한대. 아저씨는 플레이아데스를 알아? 내가 온 곳이 바로 거기야. 플레이아데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딸 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이 덕분에 알게 된 별자리가 바로 플레이아데스였다. 호주로 떠나기 전 어느 날 진이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빠 메로페가 너무 불쌍해, 하며 울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진이는 메로페에 관해 설명했다. 플레이아데스 전설이었다.


플레이아데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일곱 자매를 지칭했다. 거인족 아틀라스와 오케아노스의 딸 플레이오네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이었다. 일곱 명의 이름이 모두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메로페라는 이름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다른 딸들은 모두 신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메로페는 인간을 사랑했다. 어느 날 거인 사냥꾼 오리온이 플레이아데스 자매를 납치하려고 했다. 그러자 제우스가 나타나 자매들을 하늘의 별자리가 되도록 했다. 자매들은 일곱 개의 별이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그 별자리를 플레이아데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맨눈으로는 여섯 개의 별만 보였다. 메로페의 별만 보이지 않았다.신이 아니라 미천한 인간을 사랑한 메로페는 별이 되어서도 부끄러워했고 그래서 존재감을 잃고 날마다 희미해졌다는 거였다. 내 딸 진이는 보이지 않는 별이 되어버린 메로페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메로페가 신이 아닌 인간을 사랑했지만 그래도 행복했을 거라며 진이를 달래주었다.


진이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가 희미하다고 믿었다. 나와 아내는 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심각한 상황인 줄 모르고 가볍게 여겼던 것을 후회했다.


결국 아내는 진이를 데리고 호주로 떠났다.


아내는 진이가 호주에서 즐겁게 지낸다고 했다. 우리나라 학교로 다시 돌아오기 싫어한다고 했다. 호주에서도 백인 아이들이 진이를 멀리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집단 따돌림처럼 심각한 상황은 없다는 거였다. 아내는 진이의 성적이 나아졌다며 기뻐했다. 영어로 글짓기를 하는 진이가 대견스럽다고 했다. 진이는 필리핀과 일본에서 온 친구들과 호주의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사진 속 물결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하늘은 눈부시게 맑고 높았다. 진이는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먼 곳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진이의 미소를 보며 신화에 나오는 메로페를 떠올렸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된 메로페는 이따금 남몰래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사진 속의 내 딸 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만 같았다.




(계속) 다음 주 일요일 0시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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