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대한 소고
인간은 누구나 자극에반응하며
반응은 사고로,
사고는 판단으로,
판단은 행동, 즉 실체로,
매 순간 모인 실체들은 삶으로 일궈진다.
자극에서 실체까지.
마치 각도기의 이쪽과 저쪽이대칭에 존재하지만중심에 의해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듯 이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본유된 인간의 지적본능이 사유이다.
또한, 사유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느껴지는 앎의 욕구, 즉카지노 쿠폰(知覺)의 강도와 심도, 순도에의해 삶은 변화되며 어떻게든 연속된다. 따라서,지각한다는 것은 '앎'의 시작이자 도달이기에 '카지노 쿠폰'에 의해 현명과 우둔의 방향이, 그 방향에 의해 성공과 실패의 결과가, 그 결과에 의해 삶전체의 농도와 온도가 가치의 척도가 된다.
한마디로, 삶의 가치의 중요한 잣대가 될질료는'카지노 쿠폰'인 것이다.
'알았다'는 순간의 기쁨도 잠시, '알았다'가 '안심'과 손잡으면 대체로 위험수위에 빠졌다는 신호다. 나의 지각은 단지 내 현위치를 알려줄 뿐, '실천'으로 이어갈 다음의 '모름'까지 지각하지 못하면 고이고 썩는 '우둔'과 '아집'으로 방향을 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비로서 카지노 쿠폰은 더 높은 차원, 그러니까 애덤스미스에게서 배운'관찰자(주1)'로서의 시선을 즉각적으로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바라봄은 방금 얻은 카지노 쿠폰을다시 깨뜨리기 위한 시동이며 '시동의 감지'는 내게 '모름'에 대해 복종할 각오를 동반해야 한다. 이것이 성찰(省察)이다.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는.지각이 관찰자에 의해 깨지는 성찰의순간, 나의 앎은 모름으로 변하고 모름은 더 큰 앎으로 나를 안내한다.
무조건 있다.
없으면 안되니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완성', '완전'해질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매일 눈뜨고 맞이하는 하루는 난생 처음 맞는 새날이다.
그러니, '안다'는 지각은결론이지만 과정일 수밖에 없다.
'앎'과 동시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은 '새로운 앎'으로 채우고 채운 '새로운 앎'에도 또 틈이 생기는.
이 모든 과정을 감지해내는 관찰자로서의 지각은 늘 바쁘다. 바빠야 한다.
기존의 카지노 쿠폰과 새로운 카지노 쿠폰의 충돌에 의한 '앎'과 '모름'의 틈.
이로 빚어진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의 틈.
이 틈속충돌과 연합과 융합으로 조화된 다른 차원의 '앎'.
알았는데 모르는 순간,
달랐는데 같아진 순간,
비선형이 선형으로 이어진순간,
따로가 하나로 융합된순간,
각론이 총론으로 용해된순간,
모순이 진리로 드러난 순간.
‘이렇게 알았는데 저렇게였구나!’, ‘이 말이 저런 의미였구나’, ‘내가 겪은 그 사태가 이를 위함이었구나!’ 처럼 반성적 자각과 연역적 사고가 어우러져더 높은 차원의 카지노 쿠폰상태를 경험하는 찰나가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다.
관찰자의 시선은 분명 나보다 고차원적인 현실 너머의 미덕, 그러니까윤리, 조화, 통일, 통합이라는 거대한 가치를 품고 있다. 이 시선으로 내 가슴에 미덕이 포착되는 순간 내게 자리잡은 지각의현주소는 냉정하게 파괴된다.
인간카지노 쿠폰(知覺)의 파괴는 대지의 지각(地殼)파괴만큼 커다란 변동을 예고한다. 대지심층에서의 온도와 압력의 변화가 지축을 움직이듯 '앎'은 인식된 인지를파괴하면서삶의 지축을 흔들 정도의 강력한 진동으로어떤 방향으로든 삶을 변화시킨다.급격하거나 완만하거나 대지도 산사태나 화산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듯 인간도 그렇다.
따라서,
파괴의 통증은 아프다. 괴롭다.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카지노 쿠폰을 스스로 파괴하는, 파괴되어야 마땅한 카지노 쿠폰을 파괴시키고야 마는 이성이야말로 진정한 앎의 욕구를 아는이성이다.이러한 이성의 소유자는 스스로의 자정과 자생을 위해 기존의카지노 쿠폰을버려두거나 방치하지 않는다. 늘 새로운 카지노 쿠폰을 요구하고 포착된 그것에 순종하고 감사한다. 이와 같은 '감각에의 순응'은 올더스 헉슬리의 표현대로'신성한 무관심'을 달성하기 위한 '고행중의 고행'이겠지만 결코 나를 고정되거나 편협된 인식에 가두거나 머물게 하지는 않는다.
성 이그니티우스 로욜라는 만일 교황이 예수회 신학대학을 탄압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25분 정도 기도하고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고행 중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 부은 이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성한 무관심' 을 달성하는 것 말이다. 크게 성공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실패한다 해도 역시 좋은 일일 수 있는데, 그것이 시간에 속박된 제한된 마음에게 지금 여기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만 한다면말이다(주2).
따라서,
깨달음이란 지각의 파괴를 전제한 것이기에 기존의 앎을 거부하고 외면하여 포기하겠다는 의지로서 획득한 결과다. 다시 말해,'구체적 언어와 현상의 조합으로서의 앎'의 여백에 '추상적인 감각',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세상으로부터자극된감각이 흡수, 연결되면서 기존앎의 파괴는 포기로, 포기는 새질서를 위한질적변화로, 변화의 누적으로 야기된 앎이 찰나적인 섬광으로나의 이성에 강력한 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명사와 현상의 조합으로서의 앎'에 세상 전체를 담는,
우리의 시력(視力)이 유한성의 시력(時力)을 너머 무한성의 지력(知力)으로 차원을 달리 하는,
기존의 앎이 평정을 파괴시키고 맞이하는 재형성된카지노 쿠폰의 창조인 것이다.
'찰나의 누적이 인생'이라는 관점에 동의한다면, 깨달음은 연속되어 영속되어야 한다는 데에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깨달음은 안타깝지만 완전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다음의 파괴와상승을 위해 당겨진 화살일 뿐, 도달은 아닌 것이다.릴케의'화살은 살이 나가는 순간에 자신 이상의 것으로 초월하게 되는 것을 위하여 활줄의 긴장을 견딘다(주3).'라는 시구(詩句)는 얼마나 현실적이고도 아름다운 표현인가? 활과 화살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 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육신에도 깨달음을 위한 긴장은 필히 동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의 육신이 제대로 기능한다는 것은 전체를 위한 쓰임있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마치 어둠속의 빛처럼 말이다.깨달음은 영어로 'realize' 또는'enlightenment'로 표기된다.real,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며en-light, 섬광과 같은 그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이 지닌 과한 모험 가운데 하나가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감각, 이것은 언어를 통해 도달할 수 없다'는 헤겔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주4)는 그녀처럼 나도 그렇다.하지만 불충분하더라 인간에게 필요한 매개물로서의 언어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탐구는 언어가 지닌 표현의 한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숭고한 행위임에틀림없다.
무한한 대지에서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지금, 여기,
'현실'이라 불리는 찰나의 연속이나의 인생,나의 삶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먼 시선에서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고 현실에혁명같이 내게로 온 깨달음의 찰나에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따를 수 있는 확신이 요구된다. 모든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대접되어야 한다(주5).인간은 자체목적성을 향해 이 경이로운 영감의 순간을 지속시킬 의무가 있고 이 의무를 위해 지각의 순도를 유지해야 하기에우리는 늘 배우려는 것이며 이렇게 목적을 향하는 자는 자연의 대접을 받을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연에는 문이 없고하늘에는 천정이 없고땅에는 바닥이 없다.
이러한데도 열지 못하고 뚫지 못하고 내리지 못하는 자들은 혼나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주고 나를 깨우치는자연에게 말이다.
어떻게든날 두드려 알리려는영혼에게 말이다.
자극을 달라 소리치는 자신의 이성에게 말이다.
된통 혼나면 깨닫게 된다. 상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저 보이는대로, 알아왔던 대로만 반응했던모든 것에는나를 깨뜨리려는 의도와 의지담은 깨달음의 씨앗이 존재했었음을 말이다. 매번 혼나면서, 징징 울면서도 목적한 바를 위해 현실을 걷는 이는 지독하게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무슨 수로 표현하겠냐마는 현상에 감각이 추가되어 그 틈새에, 여백에 새로운 지각이 투입되고 여과와 투사의 반복으로 일궈낸 한걸음 한걸음의통일과 통합의 일체는 위대한 창조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획득한 잉여를 즐기려는 것도 잠시,
또 배움에 자신을 묶어둔 채 안도와 손잡지 않는 이성,
다시 파괴와 해체와 재형성의 과정으로 진입시키는 이성,
이 괴롭고 더딘 루틴으로 발길을 옮기게 하는 이성의 소유자는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하여 경이롭고 숭고하다.
그러니... 자연의 감사를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제대로 쓰인다'는 것은 유한한 것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 무한한 쓰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현실에서의 기능을 숙련시키는 것을 초월하여 '나'라는 개체는 전체 조화와 통합을 위한 쓰임의 의무와 기능과 가치를 분명 지니고 태어났다. 이 조화와 통합을 위해 쓰이기 위해서는 '초월된 지각'없이는 어설프다. 어설픈 쓰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쓰임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거대한 흐름에 나를 진입시키고 그 흐름의 속도와 방향에 맞춰 현실의 보폭을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마치...
나선처럼 말이다.
올더스헉슬리는 인간의 진화는 영적진화여야 하며 이는나선구조(주2)여야 한다고 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작은 원이 더 커다란 원으로 자체를 키우는,
막혔지만 뚫려 있고, 이어졌지만 여백으로 채워진,
중심의 불변이가변할 수밖에 없는 흐름을 따르는,
모든 것이 연결된의미있는 상승의 나선,
되돌아가려는 힘을 빼버린 진화의 과정 곳곳에 깨지고 깨우치는 순간은 존재한다.
머물고자 하지만 결코 머무를 수 없는 지적율동의 연속.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의 충돌로 빚어진 지적세공의 연속.
정신의 경도와 강도, 마음의 온도, 영혼의 순도의 지적상승의 연속.
이것이 깨달음이다.
우리의 삶은본성적이고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미지수를 품은 채 지속적으로 걷는 길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나선의 길, 고행중의 고행이라는 배움의 길, 길 위에서 만나는 깨우침을 수시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의무로서의 지각활동.
이 지독한 카지노 쿠폰변화를 위한동기품고 오늘도 나를 앉히는 이유는어쩌면 우리 모두가 안고 사는 미지수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하루'라는 이름이었음을 이제서야 알아서가 아닐까.
주1 도덕감정론, 애덤스미스, 비룡사
주2올더스 헉슬리, 영원의 철학, 김영사
주3 릴케, 두이노의 비가, 부북스
주4 한나아렌트, 정신의 삶, 푸른숲에서 아렌트가 인용한 헤겔의 문장
주5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세상
https://cafe.naver.com/joowonw/12681
[지담연재]
월 5:00a.m.[삶을 묻다]
화5:00a.m.[엄마의 유산]
수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금 5:00a.m.[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일 5:00a.m.[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