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그리고 알파 이야기
유랑생활의 시작은 제법 순조로운 듯 보였다. 그렇게 '보였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시작한 독립생활이었다. 그러나 이는 내가 꿈꿨던 독립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나는 내 힘으로, 내가 원해서 하는 독립생활에 돌입하지 못했다. 건물의 새 주인과 부모님의 협의가 이뤄지면 나는 바로 시골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랑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과거 엄마가 운영한 학원이었던 공간에 살게 되었다. 바닥에 타일이 깔린 거실에는 시골로 미처 가져가지 못해 거실을 점령한 거대한 안마의자가 텔레비전을 등지고 놓여있었다. 그렇다 보니 정작 앉아서 텔레비전을 볼 자리는 없어서 자전거 운동기구에 올라서서 보거나 주방에 서서 봐야 했다. 학원 프런트에 가스버너를 얹고 소형 싱크대를 가져다 놓은 주방은 을씨년스러웠다.
가장 구석에 자리한 내 방으로 가는 길에는 과거 세미나실이었던 유리문, 유리벽으로 마감한 공간 가득 짐이 쌓여있었다. 본래 여기가 침실이었는데 겨울을 견디기에는 너무 추워서 걱정하던 차, 가을 태풍 차바의 피해로 누수가 발생했다. 분명 막아두었는데도 비가 올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창문을 뒤로하고, 나와 다섯 강아지는 세미나실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뒤로 세미나실은 창고가 되었고, 시골에 가져가지 못한 옷장과 책상, 집기들이 자리를 채웠다. 나와 강아지들이 거실로 나갈 수 있는 통로만 남았다.
이 공간에서, 나는 매일 아침 강아지들의 분변을 치우고 락스청소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부모님이 보내주신 야채로 양 조절을 제대로 할 줄 몰라 코끼리 밥 같은 샐러드를 만들어놓고 아침 내내 먹기도 하고, 칼로리가 계산된 도시락을 배달받아 식이조절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냈었다.
3개월 정도 지나자, 나는 야식 먹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자나 깨나 건강 식단을 부르짖던 엄마와의 삶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자극적 행복이었다. 야식에는 맥주가 빠지지 않았으며, 냉장고에는 먹거리보다 술이 더 많아졌다. 자연스레 관리가 어려워졌고, 주말 대부분의 시간을 혼술을 즐기며 보냈다. 숙취로 고통받는 아침이 늘자 강아지들의 산책 커리큘럼은 하루 한 번, 개별적으로 나가는 것에서 단체 공놀이로 전환되었다. 사실 이건 맨 정신이었대도 못할 일이기는 했다. 한 마리가 나와 산책을 나가면 남은 네 마리는 건물이 떠나가라 울부짖었으므로.
이 시기.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 관리하기 어려운 인간이 강아지까지 네 마리나 데리고 지내던 이 시기에 결국 사고가 터졌다.
우리는 카지노 쿠폰를 잃었다.
학원에 새로 도입할 프로그램 교육을 받으러 먼 도시까지 간 날이었다. 개 다섯 마리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이 사는 집은 매일 청소가 필요했고, 엄마는 시골에서 나와 우리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엄마는 이십 대 중반을 넘어가지만 아직 청소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딸에 대한 불만을 열과 성을 다해 토로하며 집을 치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주 꼼꼼하게.
그동안, 다섯 강아지는 열린 문틈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이들의 탈출은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 건물이 우리 소유였을 때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문부터 옥상 문까지 잘 닫아놓는 경우가 많아 올라가거나 내려가기만 하면 강아지들을 다 잡아올 수 있었다. 건물 전 층을 우리 가족이 다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때는 달랐다. 내가 살던 3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세입자들이 살고 있었고, 옥상 문은 잠겨있었지만 1층과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이 모두 열려있었다.
엄마는 혼비백산하며 강아지들을 찾아 건물밖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도로에는 클락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엄마는 6차선 도로를 우왕좌왕 뛰어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강아지들을 붙잡아 넣었을 것이다. 초코! 알파! 두나! 세나! 하나씩 잡아넣고 나니, 낯익은 개 한 마리가 도로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카지노 쿠폰였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카지노 쿠폰를 안고 돌아왔다.
엄마는 항상 파이를 안쓰러워했다. 파이의 한쪽 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임신한 초코에게 설사약을 타 먹인 자기 탓이라면서. 엄마의 연민을 파이는 자신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라 생각했다.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은 파이는 자연스레 다정한 수컷 강아지가 되었다. 엄마는 파이를 일컬을 때, 늘 '다정한 남자'라고 했다. 그 덕분에 파이는 미쯔를 많이 사랑해 주었고, 귀여운 강아지들의 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카지노 쿠폰가 피 한 방울 비치지 않은 채로 도로 위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카지노 쿠폰가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간혹 차에 깔려도 피를 보지 않고 죽는 동물들도 있으니까. 나는 시골에서 분명 몸에 타이어자국이 나 있지만 피가 터지지 않은 어린 고양이 사체를 묻어준 일이 있다. 그때, 차에 치인다고 해서 꼭 피범벅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모든 일은 점심 나절에 일어났다. 엄마는 나에게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연락했고, 처음에는 파이가 죽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은 채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얼른 내려오라고 전했다. 오전부터 진행된 교육에 피곤했던 나는 그러마고 했고, 도착한 뒤에야 파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파이 곁에서, 형제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알파가 해가 다 질 때까지 줄곧 파이를 핥아주었고,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곁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알파는, 다정한 파이의 형제는 홀로 남겨졌다. 다른 강아지들과 내가 있어도, 그 시절의 알파는 혼자였다. 형제를 잃은 강아지는 사무치게, 외로워했다.
알파는 '여포'라 부를 정도로 괴팍한 강아지였다. 다른 푸들들은 안아줄 수 있었지만, 알파는 도무지 안기려 하지 않았다. 옥상에서 살면서 사람의 다정한 손길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고, 주려고 해도 받지 않으려 도망 다니거나 깨물깨물하며 장난감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알파는 파이와 함께 실내에 살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알파의 괴팍함은 우리의 관심 부족 탓이었는지도 몰랐다.
파이가 죽고 난 뒤, 알파는 밤이면 좀 더 곁에 다가와서 누웠다. 내 몸에 등을 붙이거나 이불속에 들어와서 자는 날도 많아졌다. 엄마인 초코와 조카인 두나, 세나와도 더 적극적으로 놀았고 그들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파이에게 했던 것처럼.
어쩌면 파이도 알파에게 많이 의지하지 않았을까? 튼튼한 알파가 하자는 대로 하면 든든했을 것이다. 책상다리에 부딪치거나 하는 일도 알파의 뒤를 따라가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알파가 철망을 이로 끊거나 몸으로 밀고 탈출하면 알파가 낸 구멍으로 튀어나가 재미있게 뛰어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옥상에서, 시골에서 살아나갔을 것이다.
파이는 2017년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알파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되어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부쩍 백내장이 심해진 알파는 가끔 주변 집기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장판에서 걷다 보면 미끄러지고, 겨울 들어서는 산책 중에 발을 헛디뎌 도랑에 빠지는 일도 더러 있었다.
알파는 아직 파이를 기억할까? 어린 시절, 늘 꼭 붙어 다녔던 눈이 불편했던 형제를.
그 카지노 쿠폰 형제의 눈가를 꼼꼼하게 핥아주었던 그 시절을.
오늘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이별했습니다. 그들과의 삶과 이별을 담은 이야기를 차근차근읽고 싶으시다면, 아래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기록 링크를 눌러보세요.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기 시작하던 시절의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