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여정
때는 2021년 6월 말, 프랑스 낭트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대학교.
기말고사를 마치고 방학식을 하기 전날이었다.
"자 이번 학기를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우리 학부 4학년 매튜(Matthieu) 신학생이 이번 학기를 끝으로 신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매튜 신학생이 신학교를 떠나 새로운 삶의 여정을 가는 길에 우리 함께 기도로 힘을 북돋아 줍시다".
신학교 교장 신부님의 공지사항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매튜는 낭트 신학교에서 내가 지내는 동안 아주 성실하고 착하고 용기도 있던 한 마디로 에이스 신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성가 노래도 잘 부르고 시험 성적도 좋아서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눈에 띄는 신학생이었고, 성격도 조용하고 진중해서 주변에 적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매튜가 갑자기 4학년을 마치고 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니, 갑작스럽게 느껴졌고, 믿기지가 않았다.
순간 나는 매튜가 실수로 되돌릴 수 없는 엄청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어려운 일에 직면했다고 예상했다. 내가 아무런 근거 없이 머릿속으로 이유를 모색하고 있을 때, 다른 모든 학생들은 교장 신부님의 공지사항이 끝나자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짝'
모두들 박수를 치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로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한 신학생이 가톨릭 신부가 되는 길을 여러 이유로 그만두게 되면, 신자들은 함께 가슴 아파하며 떠난 이를 위해 기도를 한다.
그런데 이곳 프랑스 신학교에서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미소를 머금은 박수를 신학교를 떠나는 이에게 보낼 수 있다니... 이 분위기는 내가 프랑스에서 지낸 5년간의 모습 중에 가장 놀라운 순간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매튜의 신학교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기념하기 위해, 매튜의 가족들을 신학교 방학식 미사 때 초대하고 다과회도 함께 하기로 했다. 실제로 방학식날 미사 때, 매튜의 가족들 모두가 참석하고, 매튜의 소감도 듣고, 다과도 나누었다. 그리고 신학생들 모두 매튜를 헹가래 쳐 주었다. 매튜는 신부가 되는 길을 계속 걸을지 아니면 가정을 이루는 삶을 살지 신학교에 입학하는 날부터 매일 고민했다고 한다. 늘 양쪽에 놓인 길이 좋게 느껴졌지만, 기도의 결과로써 본인은 가정을 이루는 삶에 더 적합하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진해서 신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다. 물론 매튜가 신학교에서 에이스였던 만큼, 아쉬워하는 학생들과 교수님도 계셨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모두가 그가 선택한 길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내가 다니던 성당에 계시던 신학생 분들을 기억한다. 그분들 중에서 신부님이 되신 분들도 계시고, 매튜처럼 신학교 생활 중간에 떠나신 분들도 계신다. 내 기억에, 신학교를 그만두고 떠나신 분들은 마법처럼 성당에서도 볼 수 없었다. 떠난 분뿐 아니라, 그 가족분들 까지도 성당에서 자취를 감추셨던 걸 기억한다. 그리고 '신학교를 떠난 사건'은 마치 금기어가 된 것처럼 신자분들의 비밀스러운 대화에만 조심스럽게 회자될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겪어본 나로서는 프랑스 신학교의 '신학교를 떠나는 이를 위한 파티'는 새로울 수밖에없었다. 다른 색안경이나 편견도 끼우지 않고, 단순히 한 성인의 결정을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께서 이 한 성인의 길을 축복하시길 간절히 바라며.
"네가 신학교를 떠나는데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확신이 든다면 그렇게 하면 돼. 하느님이 함께하실 거라는 믿음만 있으면 네가 어디에 있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매튜는 이 말이 신학교 교장 신부님께서 매튜의 자퇴 소식을 듣고 해 주신 첫 말씀이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인간이라는 유기체로서 무한한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알고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들었던 '칼 라너(Karl Rahner)'라는 독일의 신학자도 떠올랐다. 칼 라너는 '인간은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정의하기까지 했다. 모든 순간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하느님과 정전기에 닿는 것처럼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생애 있었던 강렬한 기쁨, 슬픔, 복잡함, 놀라움 모두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주신 일상 안의 선물들이었지 않나... 매튜를 카지노 게임 사이트보내며생각해 보게 되었다.
떠난다는 것
방학식 미사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웃으며 신학교를 떠난 매튜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지금도 가끔 매튜 생각이 난다. 나에게 그의 '떠남'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또 '하느님의 뜻'이라는 큰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떠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무언가를 떠나는 건 익숙한 것에서 벗어난 상태일 텐데... 그 어색함이... 그 낯섦이... 견딜만할 것인가?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어느 정도가 지나야 새로운 곳에서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을까?
'떠남'이라는 주제는 나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준다. 내 생각에 떠난다는 건 용기를 전제로 한다. 변화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똑바로 서있지 못하면 주변의 말에 쓰러질 뿐이다. 스스로 앞으로의 삶을 단단히 개척해 나가려면 스스로 설 수 있는 단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도 사제직을 떠났다. 신부로 서품을 받고 떠났기에 내 주변 분들이 받은 충격과 가슴 아픔은 더 크고 아렸을 것이다. 나도 이 부분에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 아픔도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는 여정의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고, 매일 하느님께 스스로 단단히 설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며 살아가고 있다. 떠남은 용기라는 큰 덕목을 필요로 하지만, 새로운 열매도 준다. 떠난 후 도착한 곳에서의 낯섦이 익숙함으로 다시 전환되고 나면, 어느새 새로운 일상 안에서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이 행복 안에는 늘 내가 믿는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신다. 변화를 통해 새로운 나를 느낀다. 변화의 시작은 익숙한 것에서의 떠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떠남은 이렇게 내 삶의 자리에서 새롭고 소중한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글을 빌어 신학교에서 함께 지냈던 매튜에게 행복하게 지내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떠남의 기로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용기가 깃들길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