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er Wanderer Feb 14. 2025

북아프리카 카지노 게임거주 에세이 #프롤로그

Tunisia, Morocco, Egypt



2013년 초, 카지노 게임 대학을 입학한 지 8여 년만에 드디어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여중, 여고를 나온 내가 대학을 졸업하는데 8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은 평범치 않았더라도, 나는 여느 취업 준비생과 다름없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두 회사에서 해외 근무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한 군데는 정규직으로 동남아에서 근무하게 되고 입사 후 즉시 미국 출장을 요구했고, 다른 곳은 인턴으로 카지노 게임에서 최대 1년까지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결정은 간단했다. 정규직도 아니고 28살 인턴이지만, 프랑스어를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카지노 게임에서, 관심 분야의 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택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북카지노 게임의 튀니지에서 일 년간 인턴으로 근무할 거라고 말했다.


“이번엔 튀니지를 간다고?”

“일 년…? 튀니지…?


"튀니지가 오데 있는데?”


카지노 게임 어렸을 때부터 적성이 뚜렷하지도 특별히 잘하는 것도 또 형편없는 것도 없었다.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지도 눈에 띄게 못하지도 않았다. 수능을 치고 부모님이 권유하는 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재학시절 내내 억지로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전공이나 취업에 대한 동기도 의지도 없이 무기력한 대학 생활의 2학년을 마치고 휴학 신청을 했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6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인도로 떠났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3주간 봉사활동을 하면서 달라이 라마 강연을 듣고, 북인도와 네팔을 2개월간 카지노 게임한 후,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룬 후에도 몇 년간 더 해외를 떠돌았다. 그러자 학교는 ‘장기 휴학으로 인한 제적처리’ 통고를 내렸다.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던 그 시절 나는 배낭카지노 게임 이외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었다. 삶이 뿌옇게 느껴졌던 20대 초반, 카지노 게임만이 '나 자신이 바라는 바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인 것만 같았다.

카지노 게임 꼬박 이틀간 북인도 '스리나가르(Srinagar)'를 출발해 '카르길(Kagil)'을 거쳐 라다크 레'(Leh)'로 가는 버스에서'카지노 게임 죽음과 맞바꾼다고 해도 이 풍경을. 눈부신 설산과 길에서 카지노 게임 흙냄새와 저 반짝이는 흐르는 물소리와 야크의 울음소리(야크의 울음소리는 그다지 편안한 소리는 아니다)와 반딧불이에게 둘러싸이는 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창가 좌석에 앉아 창문 아래를 넘어보면 바퀴가 닿은 땅이 보이지 않고 가파른 낭떠러지만이 보였다. 그 버스는 낭떠러지 아래의 끝도 보이지 않는 북인도 히말라야 산맥 도로를 요리저리 아찔하게 헤쳐나갔다.


"카지노 게임 그 도로의 창가 쪽 버스 좌석에 앉아 내 영혼이 설렘으로 가득 채워지고 내 삶이 두근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휴학한 지 4년 뒤 카지노 게임 한국에 돌아와 한국 사회의 통과의식을 치르듯 대학 졸업장을 따려고 했다. 이번에는 나의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자신이 졸업한 학과 편입을 추천했다. 다행히 이번 권유는 내 관심사와 맞아 편입을 하게 되었고, 카지노 게임 군대를 갔다 온 남자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늦게 학문에 눈을 뜬 사람처럼 즐겁게 공부했고, 배우는 즐거움과 성적은 같은 곡선을 그렸다. 그래서였는지 정부장학금으로 파리에서 교환학생 생활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카지노 게임 대학 문턱을 들어선 지 8년여 만에 대학 졸업과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 다른 낯선 대륙에서.


튀니지에서 일 년 간 카지노 게임하는 동안 한국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방문하지는 않았는데, 인천에서 출발하여 걸프 지역이나 프랑스 파리를 경유해야만 튀니지 수도에 있는 튀니스 카르타쥐 공항을 도착해야 하는 여정의 어려움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반응은 “튀니지가 어디에 있는 나라지?”, “어느 언어를 쓰나?”, “야, 거기가 재스민 혁명, 아랍의 봄이 시작한 곳 아니야? 위험하진 않니?”라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무슬림 테러리스트에게 잡히면 “알라 후 아크바르”라고 말해야 한다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알라 후 아크바르를 꼭 외어가라고 걱정하는 지인도 있었다. 게다가 그 동네는 여자가 잘못하면 돌로 부모나 형제가 가족을 죽인다고, 여성인권 후진 지역에 가냐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밟은 북카지노 게임, 튀니지는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바다와 대지에 터전을 꾸린 친절한 사람들의 삶이 자리한 곳이었다.


20대에는 학업과 카지노 게임을 30대에는 직장 생활과 카지노 게임을 병행하며 시간과 돈을 만들어 짐을 싸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던가 나는 모기가 득실대는 눅눅한 텐트, 호스텔 술 취한 외국 커플이 사랑을 나누는 같은 도미토리에서, 카라반 파크에서 공용 화장실을 쓰며 카라반을 집 삼아 살고, 여권과 지갑을 소매치기를 당해 국제 난민이 된 이후에도 카지노 게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 이외에도 호주, 프랑스, 튀니지, 이집트까지 4개국에서 10년가량 거주했으니 나는 심혈을 기울여 끊임없이 이방인이 되기를 자청했다.


‘얼마나 많은 산과 바다, 카지노 게임자 도로, 버스, 숙소에서 아름다운 인연들을 만나 도움과 영감을 받았던가! 그리고 방황하던 그 시절의 시간을 함께 걷고 그 인연들이 얼마나 내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었던가!'




왜 북카지노 게임에 대해 쓰는가?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비록 아랍어 전공자는 아니지만, 대학 시절 공부한 프랑스어 덕에 튀니지에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한국에서 북카지노 게임를 오가며 2018년부터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역사, 문화, 교육,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시작했다고 믿는다. 튀니지, 모로코, 이집트의 국교인 이슬람교와 북카지노 게임 토착민족은 한국인에게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기에, 내가 경험한 아름다운 문화, 자연, 도시, 사람들을 소개하고 싶다.


그간의 경험을 온전히 글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시선으로 그들과의 만남의 일부분을 기록한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 대한 오만불손한 태도는 아닐까' 하는 불편한 마음이 컸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인스타 카지노 게임사진과 다른 실제 해외생활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나는 이제 이 글을 통해 내가 온몸으로 경험했던 너무나도 짜릿했던 젊음과 자유, 웃음과 슬픔, 고생과 아픔, 그리고 그때마다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독자들이 북카지노 게임를 직접 방문해서 그곳에 뻗은 고대 문명, 한없이 숨 막히는 자연, 이질적이면서 매력적인 문화와 종교, 현지인의 환대와 음식을 체험하길 바란다. 그리고 아랍인을 비롯해 베르베르족, 베두인, 누비아족까지 현대를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물론 태어나서부터 분초를 다투며 생존 경쟁을 치르는 한국인이 현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현지의 ‘인샤알라‘ 문화 (모든 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에... 약속시간도 신의 뜻이다)는 여전히 이방인의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북카지노 게임에 거주하면서, 신 앞에서 온전히 하루하루를 받아들이며, 척박한 환경에서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내와 기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식사 한 끼와 같이 만족스럽거나 감사한 일을 마주할 때 ‘함둘릴라’, 혹은 ‘함둘라’라고 말한다. 신을 찬양하고 감사한다는 이 표현은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메마른 이곳에서 이들의 삶과 항상 함께한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며 길을 나서면서 스스로에게 말한다.


‘함둘릴라 (الحمد لله, 신을 찬양합니다. 신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샤알라(إن شاء الله, 신의 뜻이라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평화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