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은 병세가 심해져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아버지에게 자신이 모아놓은 얼마간의 돈을 학교 후배들을 위해 기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이 떠나고 난 뒤, 카지노 게임의 아버지는 딸이 모아놓은 과외비에 돈을 더 보태 딸의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학교에 기부했다. 그리고 얼마 후 카지노 게임이 강의를 듣던 사회과학대학 건물 앞에는 그녀를 기리는 작은 벤치가 설치되었다.
벤치 제막식이 있던 날, 따사로워 보이는 햇살과 달리 수연이 집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살얼음이라도 껴 있는 듯 차디찬 공기가 훅하고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왔다. 카지노 게임 한없이 찬 기온에 살짝 몸을 떨었다. 카지노 게임 정은이 없는, 또 준호가 없는 낯선 세상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정은의 가족들, 가까웠던 지인, 그리고 정은의 학과 교수를 포함한 학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된 벤치에는 정은을 추모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故 성카지노 게임 (신문방송학과 00학번)
당신의 희망과 꿈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정은의 모친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 문구를 가만가만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 시절 정은의 가늘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알사탕 같은 구슬 두개가 달린 머리끈으로 묶어줄 때 처럼. 그 모습을 카지노 게임 한참동안 두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았다.
모두가 떠난 뒤 카지노 게임 빌린 책을 반납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준호와 헤어진 뒤 카지노 게임 도서관에 거의 발길을 끊었었다. 도서관 뿐 아니라 그와 자주 다니던 식당과 카페 등 그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는 가능한한 피해서 다녔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걷던 길목을 지나가야 할 때면 눈물이 절로 솟구쳤다. 캠퍼스 커플의 좋은 점은 노상 붙어있을 수 있다는 점이지만 헤어지면 바로 그 점 때문에 힘들어진다. 그와 사귈 때는 이곳저곳 쏘다니는 것이 즐겁기만 했는데 헤어지고 나니 왜 그렇게 여기저기 쏘다녔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물리적 고통이었다.
그의 입으로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첫사랑과 헤어진 후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는 것이 어려웠던 그가 자신에게 사귀자고 했을 때는 마음을 주겠다는 큰 결심을 한 게 아니었나. 그런데 그 마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옮겨갔단 말인가.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연애와 취업준비를 병행하기에 부담스러워 헤어지고자 한 것인데, 최대한 자신이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비웃듯, 얼마 후 수연은 우연히 캠퍼스에서 준호가 누군가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다름 아닌 신지영이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신지영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수연은 크게 당황해서 얼른 뒤돌아 걸었다. 다행히 그들은 수연을 보지 못한 듯 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준호의 말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수연은 어쩌면 그와 우연한 기회에 재회하고 결국 서로간의 오해를 푼 뒤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수연은 친구들에게 갑갑한 마음을 토로했고, 친구들은 입을 모아 그가 나쁜 놈이라고 욕했다. 힘든 상황을 피하고 싶어 이메일 한 통으로 이별 통보를 했으니 아주 비겁한 놈이라고도 했다. 그때마다 수연은 그런 놈과 헤어진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와의 추억과 울컥하는 감정까지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참 이상했다. 헤어졌다고 해서 전원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갑자기 꺼버릴 수가 없었다. 상대는 이미 끝났는지 몰라도, 수연의 감정은 끝난 적이 없었다. 남들은 어리석다 할지 몰라도, 원래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바보가 될 수 있다. 수연은 그 날에서야 비로소 그와 정말로 헤어졌음을 실감했다.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나서니 어느덧 어슴푸레하게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병에 걸린 주인공 수지가 담쟁이에 남은 마지막 잎새 하나에 온 희망을 걸었던 것을 떠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텅 빈 나뭇가지들만이 메마른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