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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Mar 09. 2025

[카지노 게임] 1_ 봄을 세우다

- 각자의 문장으로

다음날이면 엄마는 일을 나가고 없었다. 소반 위엔 먹을 것들이 놓여 있었다. 아빠는 꼭 그 위에 메모를 남겨두었다. '카레 데워 먹으렴.' '사랑한다. 미트볼.' '약 먹어. 아빠 가슴 매우 아픔.' '오늘은 일찍 갈게. 라면 불조심.' '태어나줘서 고마워. 미역국 뜨겁게.' 학교 갔다 오면 쪽지를 열어봤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시를 읽으며 자랐다.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2023)




엄마는 늘 바빴다. 당연했다. 4남매를 키우고 있었고, 시아버지를 모셨으며, 이불 가게를 쉬는 날 없이 열었으니까. 우리를 세세하게 챙기지 못했다. 어렸지만, 그 정도는 나도 이해했다. 그러나 내가 상처를 받았던 지점은 다른 데 있었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 엄마가 우산을 들고 오지 않는 건 당연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기에 큰 실망도 없었다. 처마 밑에 비를 그으며 서 있다 보면, 구름처럼 떼 지어 몰려오는 엄마들이 신기했다. 저 많은 엄마들이 어떻게(학교 끝나는 시간은 또 어떻게 알고?) 이 시간에 동시에 나타나는 거지? 안 바쁜가? 나는 하나, 둘 우산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서 있다, 빗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뛰어가는 것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문제는 집에 거의 다 도착해 갈 때다. 학교에서 집까지 15분. 흥분되었던 마음은 가라앉고, 홀딱 젖은 옷이 점점 더 무겁고 춥게 느껴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 이르자, 젖은 운동화가 내 발을 잡아당겼다. 속옷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다. 기분도 척척 처졌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따뜻한 방에 눕고 싶었다. 그래도 집에 왔다는 신고는 해야 하니, 엄마 가게(우리 집 1층이 엄마 가게였다)로 먼저 갔다. 가게 문을 열었다. 안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음소거를 누른 것처럼 사라졌다.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동정 어린 말들을 던졌다. 그러나 정작 엄마는 별다른 동요가 없다. 힐끗 보고는 무심히 말했다.


"그 꼴이 뭐꼬? 빨리 올라가서, 씻어라"


지금의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다. 이제는 안다. 그때의 엄마의 복잡한 감정을. 동네 아줌마들의 동정 어린 말의 포장 뒤에 가려졌을 비수를. 그러나 그때의 나는 고작 열 살 남짓. 그 마음과 상황을 헤아릴 능력이 없었다. 가게 문을 닫고, 다시 걸어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가는데 턱이 덜덜 떨렸다. 내 '꼴'이 한없이 한심해 보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그때 알았다. 마음이 추우면, 정말 몸이 추워진다는 걸.


그랬다. 엄마는 다정한 말을 하거나,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신 행동으로 개척하고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마음껏 살았다. 그러나 동시에 자라는 동안 말로 많은 상처를 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현실좋음/나쁨으로 단순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순한 셋째 딸이어야 했기에 표현도 못 했다(그러나 이런 애들이 제일 무섭다. 나중에 쌓아났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며, 우주 대폭발을 했다. 허허허).


*


'카지노 게임', 그리고 '도서관'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카지노 게임첩(立春帖)'이다. 카지노 게임첩은'한 해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고 봄이 시작되었음을 자축하기 위해 문구를 써서 집 안 곳곳에 붙이는 첩자의 하나[출처 :한국민속 대백과사전])'다. 흔히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카지노 게임첩은 '카지노 게임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다. 그러나 원래 카지노 게임첩은 고정된 문구 하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민속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창작시/문구'에 가깝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사극 드라마에 보면 나오는 것처럼-'연상 시'를 짓게 해서 그 가운에 가장 잘 지은 것을 대궐의 앞에 붙였다. 민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문헌에서 따와 하나의 문장을 짓거나, 나 글 좀 짓는다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문장을 짓기도 했다. 어린아이들도 스스로 카지노 게임첩을 쓰기도 했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귀엽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와서 문장의 다양함을 엿볼 수 없게 되었다'. 민대백과 사전을 쓴 저자의 뉘앙스가 아주 안타깝다.일부를 직접 인용해 본다.




"카지노 게임첩은 가문마다 그 문구 내용이 다르며, 전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별도의 필사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 수많은 카지노 게임첩의 문구 출처는 대부분 밝히기가 어렵다. 이것은 카지노 게임첩의 내용이 글 쓰는 사람이나 집안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었고, 여기저기 선현의 기록 일부를 취해 의뢰한 사람에 의해 다시 재편집되었기 때문이다. 카지노 게임첩 대부분의 내용이 집집마다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카지노 게임첩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지고 일부는 판매가 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문장의 다양함을 엿볼 수 없다. 흔히 보이는 카지노 게임첩 문구는 ‘카지노 게임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이다. 이들 문구는 대문 좌우에 붙이며, 일부 아파트에서는 입구 공고란에 붙이기도 하였다. 현 세태를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절기상 한 해의 시작은 카지노 게임이다. 이때 '입'은 들어갈 입(入)이 아니라. 세울 입(立)이다. 나는 무식하게도 몰랐다. 세울 '입'이라고 생각하자, 카지노 게임이 달리 보였다. 렇구나. 봄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구나. 한 해는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다. 봄나물처럼 무심히 스쳐가면 모르지만 봄을 걷고, 만지고, 느끼며 스스로 캐내면 그 향을 맡고 즐길 수 있는 것이봄이다. 내가 문장을 고르고, 쓰고, 힘을 써서 세우는 것이다. 그래, 봄 문장을 캐보자.문장을 캐내다고 생각하니... 글하고 따뜻한 감정이 올라왔다.



카지노 게임카지노 게임하면 이런 느낌이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폭설이었다.(c. pixabay)

*


다정한 말은 할 줄 모르는 엄마는, 22살의 내가 전자과를 도저히 못 다니겠다고 자퇴를 해야겠다고 했을 때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 하고 싶어서 그렇게 똥을 싸는데... 마, 그냥 해라."

적나라하고, 무심한 말투('똥을 싸는데...'라는 표현은 순화해서 썼다가 다시 그대로 썼다)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남들은 잘 나가는 전자과 대신 취직도 불투명한 사회학과로 간다고 다 말리던 시기였다. 게다가 국립대에서 사립대로 옮겨서 등록금도 3배 이상 뛰었고, 지역도 대구에서 서울로 옮겨야 했다. 그 불확실성에 나조차 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엄마는 툭, 말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 나는 그 말이 '네 뒤에는 엄마가 있다'로 해석됐다.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30대 중반의 나는4살, 6살 애 둘을 보며, 3주에 한 번 <지식채널 e를 만들고,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이렇게 쓰고 보니 '갑자기'가 아닌 것 같긴 하지만암튼)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됐다. 아이를 당장 봐줄 사람이 없어, 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했다.


'지금엄마간다불편하지항상건강을쟁계야한'


오타도 많고, 띄어쓰기도 되어있지 않은 엄마의 문자였다.엄마는 기차에 앉아 이 문자를 보냈고나는병원 침대에 누워서 받았다.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무심히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안도했다. 나는 이제 괜찮겠구나. 이 아픔도 지나가겠구나. 나는 이렇게, 나를 일으켜 세워 줄 단단한 문장을 먹고 자랐구나.



고명재 시인의 부모의 짧은 문장들도 그렇다. 나도 이제 부모가 되고 보니, 마음이 전해진다. 어두울 때 들어와, 어두울 때 나가며 쓰는 '시'. 두 형제의 잠든 모습을 보며 썼을 그 '시'의 행간에는 얼마나 많은 마음이 숨겨져 있을... 상상해보면 이런 문장이 아닐까.

"어제 들어와 보니 너희가 자고 있더라. 엄마/아빠는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면서도 너희 생각을 했어. 밥은 먹었을까. 춥지는 않을까. 둘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같이 못해서 미안해. 저녁을 같이 먹고 집 앞을 산책하고 싶은데. 너희와 동네 공원으로 가서 야구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천사같이 자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잘 커줘서 고마워."


이런 마음을 졸이면 나오는 문장들이, 이런 것들이다.

'사랑한다. 미트볼.''카레 데워 먹으렴.' '사랑한다. 미트볼.' '약 먹어. 아빠 가슴 매우 아픔.' '오늘은 일찍 갈게. 라면 불조심.' '태어나줘서 고마워. 미역국 뜨겁게.'...

아리고 시리고 대견하고 따뜻한 마음을 졸이고 졸여, 나온 문장들. 맞다. 정말 시가 맞다. 우리를 일으켜 세운 문장이 맞다.



*


도서관에서 '카지노 게임대길 건양다경'에 갇히지 않은 봄의 문장을 쓰고 싶었다. 각자의 마음을 졸인 문장을 써서 한해를 열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만의 '카지노 게임첩 쓰기'를 해보며, 올해를 시적으로 열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늘 이상과 같지 않다. 카지노 게임의 시기에는 눈이 휘몰아쳤다. 방학을 맞아, 모두 어디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너무 혹한의 계절이라 그런가? 도서관에는 사람 보기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었지만, 행사 치르듯, 워밍업 없이 갑자기 강요(?)하기는 싫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예열이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만의 봄 문장을 쓸 예열을 할 수 있을까.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울프 일기』에서 글쓰기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좋은 문학 서적을 읽기와 가벼운 운동'이라고 했다. 맞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먼저 좋은 문장을 읽어야 한다. 좋은 문장을 읽었다고, 모두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문장을 읽지 않은 사람이 좋은 문장을 쓸 수는 없다.나만의 봄의 문장을 쓰기 전에 함께 읽기를 먼저 해보고싶었다. 그러나 어른들이나, 너무 어린아이들은 어렵다(같은 이유다. 둘 다 말을 잘 안들...). 그렇다면 누가 좋을까? 그때, 집에서 뒹굴고 있는 짐승과 사람 사이의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중2 둘째다.


그렇게 눈이 많이 오는 카지노 게임의 시기, 나는 중학생들과함께 < 한국단편소설 읽기 낭독을 시작했다.


카지노 게임도서관+중학생+고전 낭독 =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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