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주 Mar 25. 2025

[온라인 카지노 게임] 미칠듯이 끌리지만, 죽도록 도망치고 싶은 마음

에곤 실레 <자화상

불편한 그림이 던지는 강렬한 질문


내게 미술관은 낯선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익숙했던 이곳에서 문 하나를 열면 문밖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미술관은 익숙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고,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기도 다. 내가 미술관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낯섦'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기도 하고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가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강한 낯섦을 만날 때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마음에 일어나는 강렬한 파장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미술관에 갔을때 너무 강렬해서 마치 이 그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2022년 서울에서 열린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만난 그림 한 점이 그랬다. 한 개 층을 다 차지할 정도로 넓은 박람회장에는 셀 수 없는 그림들로 가득했다. 벽 하나에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작품에서 큰 파장이 일렁거렸고 나는 그 앞으로 가까이 끌려 들어갔다. 작품을 보는 순간 '와! 미쳤네'하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선이 모든 것을 다한 드로잉이었다. 무심하게 몇 줄 그려 넣은 선이 마음을 어지러이 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에곤 실레(1890~1918)의 자화상이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곤 실레 <자화상, 1910


이 미친 작자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도록을 보며 놀라움과 두려움이 연속해서 찾아왔다. 에곤 실레의 작품울 보며두려움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머리채를 확 끌어당기는것 같았다.그림은 나의 속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들여다보며 끊임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너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바라볼 수 있는가?

"감추어진 어둠을 꺼내볼 수 있는가?"

"지독한 외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가?

"자아의 쪼개지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

...

"그럼에도 정말 자신을 알고 싶은가?"


그의 정신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나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더는 끌려 들어가지 않게 발끝에 힘을 주며 버텼다.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나를 비추어 볼 수도 없었고 그의 작품을 통과해 나갈 힘도 없었다. 도저히 그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에 끌리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열지 못했던 문 앞에 다시 서본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그린 그림


온라인 카지노 게임
온라인 카지노 게임
(좌) <엎드린 누드, 1917, 종이에 과슈, 크레용, 29.8X46.1cm / (우) <왼쪽다리를 세운 여인 1917, 종이에 과슈, 크레용, 46×30cm


자화상에 이끌려 에곤 실레를 알게 되었지만, 그에 대해서 알수록 더 시선이 가는 것은 성(性)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보통의 누드화처럼 여성들아름다운 포즈를 잡으며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드러낸 그림, 심지어 자기 성기를 만지며 도취표정을 짓고 경우도 있었다. 다가 그림속 모델중에대 미성년자도 있었다는것이 충격에 빠지게 했다.


지하철에서 책을 보다가 그림이 나오는 부분은 빠르게 넘기면서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았고, 집에서는 혹시라도 아이들이 볼까 봐 신경이 쓰였다. 나는 '성'에 대한 주제가 무서웠다. 금지된 것에 손을 대는 것 같았다. 금기된 것은 호기심조차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금기된 것을 상상한다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에곤실레의 그림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 얼굴을 쳐다보면 물어보는 것 같았다. '너 무슨 생각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야?'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에곤 실레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애를 살피며 이 화가가 성적 콤플렉스가 있거나 퇴폐적인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에곤 실레의 모델은 직업적인 누드모델아니라 자신의여동생, 처제, 심지어 대 소녀들까지도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편견과 달리 에곤 실레의 사생활은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꽤 보수적인 가정에서 교육받았고, 외모도 말쑥하고 반듯했다. 그는 많은 여자들과 사귀지도 않았으며 한 명의 모델과 깊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또 결혼은 사랑보다는 조건이 좋은 보수적인 가정의 여자와 했던 정말 갈등이 많은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에곤 실레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천재의 광기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고뇌였단 말인가?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났다. 야한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의 사춘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때의 어린 나는야한 상상을 했다는 것만으로 부끄러워하고, 잘못된 생각을 한것들통날까 봐 두려워했었다. 나는 소녀처럼호들갑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에곤 실레가 삶이 더욱 궁금해졌다. 성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 인간으로서의 실레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무엇과 마주했던 것일까?



자신을 알고자 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에곤 실레 <얼굴을 찡그린 벌거벗은 자화상 1910, 알베르티나 미술관


화가들의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탐구이다. 에곤 실레는 자신에 대한 많은 그림그렸다. 그가 그린 자화상은 겉으로 보이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얼굴을 찡그린 벌거벗은 자화속의 그는 옷을 모두 벗은 알몸인 채 서 있다. 몸은 무용이라도 하는 것처럼 기괴한 포즈를 취하고 있고 몸의 비율도 맞지 않다. 이 그림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심지어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불편해하고 있는데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과장되어 보인다. 을 벗은 자연스러움 보다는 어색한면이 더 많고 구부러진 몸은 역동적으로 보이지만 기계처럼 경직되어 있다. 반면 나무 인형 같지만 살아나 움직일 것만 같은 이중적인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혼란과 갈등으로 가득하다.


에곤 실레는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아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다. 돈은 부족함이 없었지만 냉담한 어머니에 대한 애정결핍이 있으며 아버지는 매독으로 실레가 15세가 되는 해에 사망한다. 성(性)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시기에 성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아버지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에곤 실레의 그림 속에는 이런 갈등이 느껴진다. 그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추함이고 비틀어진 것이고 상한 것이고 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추함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은 추함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벗어나고자 분투했다. 그림 속에는 성에 대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뿐 아니라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 보인다. 고독함 너머 사랑받고 싶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허무하지 않은 진정한 쾌락을 알고 싶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죽어가는 것 속에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 성에 대한 에너지와 함께 끓어오른다. 그의 자화상들은 이렇게 갈등하고 분열하고 대한다.


내가 에곤실레의 그림에서 멈칫거렸던 이유는 바로 이 에너지 때문이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에너지가 너무 매력적이서 끌렸지만 감당할 수 없어 피하고 싶었다. 그 치열한 분투의 에너지가 성적 에너지가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삶에 대한 에너지가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왜 삶을 두려워했을까? 내가 온라인 카지노 게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찾아


에곤 실레 <이중 자화상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32.5X49.4cm


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라는 단어를 터부시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생각하면 금기, 욕심, 헛된 망상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욕심이고 헛된 것이기에 잘못된 것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품으면 안 되고 처벌받을 수있는 행동이었다.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품어라.","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긍정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분수에 맞게 살아라.", "네 주제를 알아라."라는 말이 공기처럼 함께했다.


내 그릇은 정해진 것만 같았고 주어진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하고 그 생각은 강화되었다. '주제'에 맞게 살라는 말이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주제'에 맞게 살아야 했고 나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나의 '주제'는 '의무'였다. 나는 내가 입는 옷에 맞게 살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로, 딸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회사에서의 아무개 직책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의무였고 주제였다.


나는 내가 그런 옷을 입고 살고 있는 줄도 몰랐다. 회사에 출근하던 어느 날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내 옷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급하게 그 옷을 벗었다. 옷이 없어지고 나니 추웠다. 수치스러웠다.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기도 하고 찡그려보기도 하고 진짜 내모습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옷을 벗고 나와나의 속살을 보고싶었는데정작내 몰골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누구지? 대체 나는 뭐지? 이런 물음 속에 많은 길을 헤매었다.


길을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열리는 글쓰기 수업 공지를 읽었다. 일요일 저녁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끼리도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주말에는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에게 주말 집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일터이기도 했다. 일요일 저녁에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근무지를 일탈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내 근무지를 일탈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퇴사 할 수는 있어도 불성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요일 저녁 글쓰기 수업에 참여했다. 내 인생에 미해결 된 과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문제를 풀어야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매일내 감정에 대해 써 내려 갔고 일요일 저녁마다 수업을 들었다.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일요일 저녁마다늘 입던 옷을 벗고 나올 때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시원하고 홀가분했고 마치 나를 찾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괴로움이 찾아왔다. 모험을 찾아 떠나고 싶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안정을 유지하고 싶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둘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몇십 년간 나를 형성했던 주제와 새로운 주제가 서로 대립했다. 변화하고 싶은 나와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내가 둘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는 자유롭고 싶어 하면서도상 자유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로 인식했다. 나는 두갈래의 마음 사이에서 분열과 분열을 거듭했다. 자기답게 사는 것, 자기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아는 것은 지독하게 어렵고 고독하고 끔찍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에곤 실레가 자신을 저리 혼란스럽게 그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삶에서알게 되었다.



이제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함께


<자신을 보는 자 II (죽음과 인간), 1911, 캔버스에 유채, 80.3X80cm, 레오폴드 미술관


에곤 실레의 그림이 두려웠던 것은 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바라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알게 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채워가야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채운다는 것은 찰나의 쾌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것을 내 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미움받고 오해받게 되더라도 새로움으로 고독하게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알게 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어려움을 알기에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어 온라인 카지노 게임으로부터 고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맛을 보고 나면 되돌아갈 수 없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 주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 저녁 글쓰기는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때의 좋은 경험은 지금도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그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은, 그 글을 쓰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글이 어색해지기도 하고,더 쓰지 못한 말 때문에 답답할 때도 있지만 나는 글을 쓰며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고 있다.


나는 이제 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찾아가고 있다. 에곤 실레가 이중 자화상에서 자신의 분열되는 모습을 그리며 자신을 계속 마주하는 것처럼 이제 나는 나의 여러 모습을 알아가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럴싸한 모습뿐 아니라 나조차도 두려워 숨겨둔 모습까지 샅샅이 찾아가고 있다. 내 안에 기쁨뿐 아니라 수치심, 불안, 우울, 두려움 등 마주하기 힘든 무거운 감정도 만나고 있다. <자신을 보는 자 II (죽음과 인간)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상황까지도 마주하려 하고 있다.



'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끝에는 사랑하는 '너'가 있다.


에곤 실레는 자화상과 같은 배경으로 연인 발리의 모습을 그렸다. 이 시기에 발리는 에곤 실레에게 '유일한 빛'이었다. (1912년, 네오폴드 미술관)


자신에 대해 쓴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일까? 에곤 실레는 나르시시즘이 화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만 그다지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자기애에'지나친'이라는 수식어가 쉽게 붙여진다. 나르시시스트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지나친'이라는 부정적 평가 때문일 것이다.


에곤실레가 정말 자기에게만 '지나치게' 몰두했을까? 자기를 그린 자화상을 보면 자신에게만 몰두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싶은 자신은 아름답기만 한 자기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찾고 싶었던 것은 '낯선' 자기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친숙하지 않은 불안, 공포스러운 죽음, 지독한 고독을 마주한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나에 대해 쓴다는 것은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익숙한 '나'에서 낯선 '나'로 나의 범위가 넓어진다. 접혔던 마음이 펼쳐지면서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진다. 가끔 상상한다. 이렇게 넓어진 마음은 다른 세계로,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이의 마음에도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갖는다. 에곤 실레가 나르시시스트라면 나는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싶다. 낯선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너'를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쫓아 저 멀리 있는 '나'를 찾아간다. '너'와 만나게 되는 상상을 하며 '나'와 '너'의 간격을 좁혀 간다. '나'의 끝에서 사랑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