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사회 3편
디지털 사진과 필름 사진의 가장 큰 차이는 "생성, 노쇠, 죽음"의 유무라고 이미 밝혔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무료 카지노 게임성의 유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료 카지노 게임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생식하고 노쇠하여 죽어간다. 이러한 생명력은 무료 카지노 게임가 가진 한계이자 유한한 운명의 생명체가 순환의 역사를 통해 무료 카지노 게임의 근원이 되는 일종의 정보 전달을 수행하는 힘이다.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는 어느 하나 무가치한 것이 없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거나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다. 각 시기는 고유의 가치를 가지며 삶이라는 전체성을 온전히 채운다.
투명성은 이러한 무료 카지노 게임성을 '가시적인' 것, 즉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소비는 '가치평가'를 가시화한다. '좋아요'의 개수는 소비의 지표이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좋아요'의 대상이 아니다. 평범한 40, 50대의 관리되지 않은 무료 카지노 게임는 다듬어진 20대의 생명력 앞에서 초라해지고 만다. 그들의 볼품없는 무료 카지노 게임에 새겨진 '역사'는 평가되지 않는다. 20년 전 인화된 빛바랜 사진은 낡은 기술 문명의 유물일 뿐이며, 혹여 그것이 주는 '낭만'은 필터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기술적 도구 이상의 가치는 없다. 무료 카지노 게임에 새겨진 흉터는 제거의 대상일 뿐이고, 불완전함의 상징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무료 카지노 게임에는 다섯 가지 흉터가 있다. 이것을'성흔', 즉 '스티그마타(stigmata)'라고 한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에 남겨진 이 자국은 신의 완벽함을 위해 지워지지 않는다. 손상되지 않은, 흠결 없는 예수의 몸은 '성흔'을 담은 무료 카지노 게임를 대신하지 못한다. '성흔'은 인간과 신의 또 다른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은 두 번의 계약을 맺는데, 하나가 옛 약속을 의미하는 '구약(old testament)'이고 다른 하나가 새로운 약속인 '신약(new testament)'이다. 구약은 인간이 지은 '원죄(original sinn)'으로 인해 신과 인간이 분리됨을 말하고, 신약은 약속한 메시아의 재림을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됨을 말한다. 재림하는 신은 신과 분리된 인간이 받는 무료 카지노 게임적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신이 인간의 무료 카지노 게임적 고통을 온전히 느끼고, 인간의 모든 죄를 신이라는 무형의 존재가 아닌 무료 카지노 게임를 가진 존재가 감내하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계약'이 주는 숭고함이다. 예수의 탄생을 '육화(lt. incarnatio, en.incarnat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료 카지노 게임, 고기를 뜻하는 라틴어 caro에서 비롯되었다. 무료 카지노 게임는 숭고함의 서사를 전달할 수 있는 '역사성'을 지닌다. 투명성이 무료 카지노 게임를 소외 상태로 만들기 전까지 우리는 모든 상태의 무료 카지노 게임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투명성은 성형기술로 우리의 무료 카지노 게임의 부정성을 제거하여 단 하나의 상태, 즉 매끈한 긍정성의 무료 카지노 게임만을 지향하게 만든다.
작가 한병철은 역사성을 지니지 않은 무료 카지노 게임를 '전시'에 비유한다.
포르노는 에로스뿐만 아니라 섹스마저 파괴한다. 포르노적 전시는 오히려 사람들을 섹스의 쾌락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에 따라 쾌락을 삶의 일부로 삼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 <투명사회, 33쪽 -
포르노그라피의 장대한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포르노는 과장된 연출임은 자명하다. 은밀함이 사라진 섹스는 별점의 대상이 되고 만다. 나와 그녀의 이야기는 대중에 의해 평가되고, 잘잘못을 따지기가 가능한 상태에 돌입한다. '우리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룰은 타인들의 평가에 의해 '공동체'의 가십거리가 된다.실제로 여러 방송에서 연인들의 사소하거나 큰 문제들은 '사연'으로 등장하여 대중의 구경거리가 된다. 소위 '깻잎논쟁', '패딩논쟁' 등은 '둘만의 은밀함'을 거부하는 사법적 영역을 기웃거린다.옳고 그름의 명확한 기준과 법적 논쟁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에로스'는 날개를 잃어버리고 추락한다.
이상형을 묻던 2000년대 초반의 나태함은 남자와 여자의 신체의 사이즈에 대한 천박한 궁금증으로 전락했다. 비유와 상징으로 대답하던 '이상형'은 무료 카지노 게임에 대한 구체적 수치화와 사회적 능력에 대한 계좌의 수치화로 바뀌었다. '동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얼마나 오래 디지털 사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대한 평가일 수 있다. 자연스럽게 늙는 모습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무료 카지노 게임는 최적화시켜야 할 전시 대상으로서 사물화 된다. 이때 무료 카지노 게임 속에 편안히 거주 Wohnen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료 카지노 게임를 전시하고 무료 카지노 게임를 착취해야 한다. - <투명사회, 33쪽 -
"전시 Ausstellung는 곧 착취 Ausbeutung다." 여기서 착취 Ausbeutung는 '전리품', 즉 '누군가가 빼앗은 것' 또는 '희생자'를 의미한다. 전시가 곧 착취임을 증명하는 장소가 있다. 바로 박물관이다.
대영박물관은 800만여 점의 소장품을 보유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박물관이지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국제 박물관 헌장에 따르면 소장품 가운데 자국의 물품이 75%를 넘지 않으면 무료로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이 이 헌장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장의 정당성이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듯 박물관과 미술관은 '착취'의 직접적 증거를 포함한 장소이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무료 카지노 게임는 거주성을 잃게 된다.
미술관은 그리스어 mouseion에서 알 수 있듯 뮤즈들의 성역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40년에 설립된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은 도서관과 함께 각종 서적과 미술품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근대 미술관은 르네상스의 제후 혹은 부르주아들이 개인 소장을 위해 수집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예술과 경이로운 방(Kunst- und Wunderkammer)라고도 불리는 이 수집가의 방은 대항해시대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가져온 진귀한 것들을 모은 이국적 소품들로 가득했다. 이 방에 걸려있는 수많은 동물들과 물품들은 그것들이 활동하거나 사용되던 환경 혹은 상황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그냥 그 존재들이 방에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동물이 살던 환경에 적응한 습성과 외형에 대한 단서는 주어지지 않고, 독특한 외형만이 구경의 대상이 될 뿐이다.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드는 파리의 루브르에는 방문객을 기다리는 훌륭한 걸작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그 유명한 작품들은 80년대 골목에 빨래가 널려있듯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세기의 예술가들이 평생을 바쳐 완성한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표피적'으로만 인정받는다. 작가 한병철이 '거주(wohnen)'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이데거의 '짓기, 거주하기, 생각하기(Bauen, Wohnen, Denken)'(1951)를 염두에 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이데거는 건물을 짓는 것과 거주하는 것을 독일어의 어원을 사용하여 '존재'와 결부시켰다. 그리고 '존재'는 데카르트를 통해 '생각'과 이미 연동된 바 있다. 예술품이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거주'할 수 있는 곳에 놓여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술품의 올바른 거주지는 어디인가?
이탈리아의 많은 교회에는 프레스코화들로 가득하다. 건물을 통째로 옮기지 않는 이상 이 작품들은 특정 미술관에 전시될 수 없다. 반드시 이 교회로 와서 700년 전의 신도들과 예술가가 드나들었던 입구를 통과해야만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심지어 관찰자의 눈높이에 적합한 위치에 그려져 있지도 않다. 불편한 자세로 고개를 들어 천장과 벽면의 이곳저곳을 사람들에 떠밀리며 보아야 한다. 미술관처럼 통제된 조도가 유지될 수도 없다. 흐린 날과 맑은 날에 작품은 더 혹은 덜 선명해 보인다. 시간에 따라 작품의 마모도도 극히 심해진다. 모나리자와 같이 유리박스에 '안전하게' 보관될 수 없고, 관객들의 눈에 벌거벗겨 드러날 수밖에 없다. '거주의 무료 카지노 게임를 지닌 예술품'은 전시의 그것과는 달리 관람자의 환경, 다양한 감각 그리고 경험이 얽혀서 그들의 기억에 저장된다.
미술관은 예술품을 가장 적절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보존한다. 이곳에 보관된 그림은 100년 뒤에 감상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그것을 '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가 핵심이다. 하지만 특정 장소를 위한 예술품은 그 장소와 시간을 공유한다. 유지보수를 위해 수년간 문을 닫는 경우도 생기기에 때가 맞지 않으면 수년간 감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시'를 위한 미술관은 때론 '미술품의 무덤'으로 여겨지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