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진짜 해야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었다. 아, 왜 또 안 받는 거야.
드라마에 나오는 변호사들을 보면 다 청산유수지만, 말싸움 같은 거 잘 못 하고 집에 와서 아차 그 말할걸 후회하는 나 같은 변호사도 있다.
법정에서 다투는 일이야 법과 논리로 무장하고 가니 문제없다. 그런데 외주업체 대표와 실무 협상을 한다면? 상대가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주 거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이라면? 가령 '님은 사무실에서 엑셀이나 두드리면서 편하게 일하지? 난 오늘도 은행에 가서 빌고 왔어요오' 하고 언성부터 높인다든가...
저 대표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온실 속의 화초 같은 월급쟁이 실무자였다. 갈등이 생겼을 때 <카네기 인간관계론부터 폈다(원래 범생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책 펴고 공부부터 한다). 하지만 책으로 배운 처세술을 실제 적용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나 대화법'이라는 것을 배우고 나서 동생에게 써먹었을 때가 생각났다. 상대방을 비난하기보다 "네가 그러니 내가 속상하고 화가 나는구나"라고 내 감정을 전하라 해서 그대로 해보았는데, 기 센 동생의 반응은 그랬다. "그럼 화나라고 그런 거지 좋으라고 그랬겠냐?"
사내변호사는 다양한일을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정말 특수한 일이었다. 기존 판을 완전히 갈아엎고 기획과 개발을 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건인데, 졸지에 PM을 맡게 되었다.
곁에서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보고 법적 리스크가 이러쿵저러쿵하고 설계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시라며 숟가락만 얹어 보았다. 고스란히 하나의 완성된 서비스를 구축해 본 경험은 당연히 없다. 눈치코치로 보고 따라 할 선배도 없다. 조언을 구할 동료도 없다. 어디서부터손대야 할지 너무, 너무 막막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돌덩인가 싶었는데 만지다 보니 이게 코끼리 다리인 걸 알았다. 다 만져보고 나니 이 코끼리는 세상 거대한 코끼리였다. 게다가이 코끼리, 좀 아픈 아이 같다. 어떻게 고쳐야 하나 매 순간 의사결정이 필요한 이슈가 이렇게나 많다니 중증외상센터 외과의사가 된 기분.
감당 안 되는 일인 건 직감했다.표지도 한번 열어보기 싫은 아주 두꺼운 벽돌책만 같았다. 뭐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만 하다가 덮어버렸다.
하지만 도저히 더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와버렸다. 회삿돈이 쥐어졌고, 직함이 주어졌고, 셀프로 데드라인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협업툴로 팀원 모두가 볼 수 있는 대시보드를 만들고 파악한 모든 것을 게시했다.
먼저 이 일을 왜 해야 무료 카지노 게임지 이해해야 했기에 프로젝트의 목표 3가지를 썼다. 이렇게 나침반을세운 것은 잘한 일이었다. 평소 검토하는 법무 일이라면 직속 상사나 선배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렇지만 이 건은 기댈 곳이 없었다. 프로젝트 리더로서 헷갈리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대시보드를 펼쳐봤다. 그 목표에 부합하는 선택인지 목표와 대조해서 생각해 보았다.
다음으로 엉망진창인 창고에 쌓인 짐을 정리하기 위해 하나하나 바닥에 일단 내려놓아야 하듯, 건드려야 하는 안건들을 그냥 다 펼쳐 보였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여도 조금씩 적어보니 적어도 어디까지는 알고 어디까지는 모르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정리된 안건은 이메일로 다시 정리하여 공유했다.
리딩하는 입장에서 누구에게 위임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을지 모르나, 시키는 것도 뭘 알아야 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일이 코끼리임을 알 때까지는 직접 쓰고 정리하면서 파악해나가야만 했다.
회의를 잡았다.
혼자 펼쳐놓고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건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간을 뺏는 빌런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빌런이 되더라도 회의를 해야만 했다. 내부 의견을 모아야만 했고, 타 부서 전문가 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 누구랑 해야 하나, 진짜 이 회의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백번 고민하는 데도 시간을 엄청 썼다.
킥오프 미팅을 하는데 다섯 개가 넘는 부서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등짝에 한 줄기 식은땀이 났다. 평소에 전문가로서 다른 부서에 의견을 드릴 때와는 포지션이 달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보다 경력이 훨씬 많은 분들과 소통을 해본 적도 없었다. 설계와 연동개발에 관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오가니 두 눈은 동공지진이다.
들킬까 겁을 내며 두 시간 연속으로 회의를 하며 온몸에진이 다 빠졌다. 회의를 하고 나면 해결되는 게 있을까 했지만, 랩업하고 보니 숙제만 한 다발. 이런 회의를 하루에 몇 차례나 하고 나고 어딘가 드러누워 생각한다. 이렇게한 건으로만 하루 종일 회의하고 정리하고 반복한 적이 있었나? 없다.
과정은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일을 착수할 때 이런 회의는 미룬이에게 꽤 유용했다. 일 자체에 압도되어 열어보기도 싫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아버리니, 결정해야 할 건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그 일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이 건이 지금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 다 같이 알아볼 수 있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식별조차 되지 않았다는 현실일지라도.
다시 썼다. 그리고 도움을 구했다.
평소와 다르게 그때그때 회의를 랩업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들을 땐 이해된 것 같다가도 휘발되어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두 잊어버리곤 했다. 대시보드에 회의록 공간을 만들어서 직접 회의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회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도움을 구할 일들도 정리했다. to-do 체크박스 다섯 개에 어느 항목을 누구에게 할당할지 결정하는 것도 내 몫이다. 역시나 해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머리 싸매고 또 고민 중독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업무분장을 하고 회의록 발행 버튼까지 눌러야 이 회의가 끝난다. 그렇게 다시 써가며 일을 나누고 요청한 일을 다시 모아 읽고 정리해나가보니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일의 진척이 느껴졌다.
이 프로젝트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실제로 팀원들과 주고 받고 해 보고 나서야, 이 일이 절대 혼자서 고민해 봤자 풀리지 않는다는 걸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직장인 10년을 채워가는 지금에야 비로소 일의 본질이 소통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절대 읽어나갈 수 없는 1,000페이지 책 같은 프로젝트를 자꾸 펼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냥 눈 감아버리고 싶다, 하던 일을 보고 또 보니 어느새 압도감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끝없이 반복하고 반복하자 일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어거지로라도 몰입 상태로 밀어 넣으니까 실마리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프로젝트, 우리 집 인테리어 할 때랑 굉장히 비슷한 면이 많잖아? 비슷한 일을 했던 경험이 생각나면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왔다.
고민으로 방황하는 머릿속을 앵커링 해주는 것은 기록과 약속이었다.
생각하기 싫은 일을 생각하는 게 버거울 때 대시보드를 열고 해야 할 일을 써나가거나, 메일 창을 열고 전체 메일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기록을 보며 다른 망설임 없이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고, 지금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힘든 프로젝트였지만, 어떻게 하면 일에 직면하고 몰입 상태로 닻을 내릴 수 있는지 몸으로 터득했다.
아, 그 대표님과의 소통은 여전히 쉽지 않다. 다만 1년이 지난 지금은 온실 속의 흑화한 화초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전처럼 협상 시나리오를 미리 써본다든가(?) 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지는 않아도 괜찮다. 나만의 대시보드에는 온갖 팩트와 고민이 이미 잔뜩 버무려져 있다. 이것으로 무장을 하면 별로 두렵지 않다.
더는 망설이며 미루지 않고 전화를 건다. 마음에서 불이 나지만 전화를 끊고 곧바로 싸운 내용, 아니 유선 논의한 내용을 적어둔다. 팀원들에게 공유한다.
그분 또 그러시네요, 고생했어요, 하는 한 마디에 어느새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 하며 허허 웃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무료 카지노 게임 다 했니?
그럼 다음 일을 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