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내가 화장실 가다가 들었거든, 내일 아줌마가 우릴 갖다 버릴 거래. 그 전에 아줌마를 찢어발기자. 우리가 죽인 토끼들 옆에 무덤 정도는 만들어 줄 생각이야. 토끼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건 오빠의 즐거움이잖아. 아줌마는 가슴이 크니까 그건 따로 잘라서 넣어야겠다. 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 여긴 아줌마가 오기 전부터 우리 집이었어, 난 절대 쫓겨나지 않을 거야.
너 시들지 않는 새엄마를 시기하고 있구나. 아버지가 무능해서 고생하는 예쁜 나의 새엄마. 그녀가 나를 버려도 괜찮아. 개처럼 기어가서 굶겠다고 말하면 그만인걸. 그게 안 먹히면 그녀의 가슴을 빨고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 잠 설치는 아이를 달래는 척 밤마다 날 찾을지도 몰라. 자꾸 커지는 나를 본다면 오히려 그녀는 아이가 되겠지. 아, 못생긴 엄마가 떠나면서 주고 간 선물. 예쁜 우리 새엄마!
2014 경향신문 카지노 게임 당선작
당시 카지노 게임자였던 황현산 평론가와 김사인 시인은 본심에 넘어온10인의 카지노 게임을재독한 후이호준·엄기수·카지노 게임3인으로 일단 후보를 압축했다고 한다. 우선 탈락자인 이호준과 엄기수의 작품에 대해 심사자가 어떤 평을 했는지 살펴보자.각각의 평에 이은글은 카지노 게임평에 대한 저만의 주관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
"이호준의 감각과 솜씨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의 매력적인 언어들은, 필요하다면 신선함조차 연출할 수 있을 만큼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노련함과 자신감의 과잉이 오히려 시적 모험의 기개와 순결성을 손상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 필요하다면 신선함조차 연출할 수 있을 만큼이라고 했으니 응모자의 감각과 솜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어서 노련함이 시적 모험의 기개를, 자신감의 과잉이 순결성을 손상하기도 함을 지적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노련함과 시적 모험의 기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시적 모험의 기개는 신인으로서의 거칠고 투박함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노련하다고 해서 거칠고 투박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정말로 노련하다면 시적 모험의 기개조차 인위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까? 신선함조차 연출 가능한데 그만한 기개조차 연출하지 못했을까 싶다.
그런 논리로 카지노 게임평에서 언급한 자신감의 과잉을 해석해 보자. 이는 어떻게 순결성을 손상시켰을까? 대체로 자신감의 과잉은 안정감을 넘어선 화자의 정서적 폭주를 일컫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투박하거나 거칠다는 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순결성의 정의를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순문학적 정의로 보자면 이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시라는 장르가 지닌 원론적인 순수성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시적 모험의 기개와 순결성을 굳이 따져보자면 대척점에서 길항하는 관계이지, 함께 가는 성질은 아니지 않을까?
"엄기수도 이미 능숙한 시인이었다. ‘이끼소녀’ 등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바 비애를 갈무리해 내는 낮은 톤의 목소리는 오랜 습작의 내공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어투와 시적 조형방식에는 선배 시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낯익음이 없지 않았고, 시들이 좀 더 다채로울 필요도 있을 것이다."
- 낯익음이 없지 않았고,라는 이러한 표현이야말로 때로는 참으로 모호하게 들린다. 나는 여태껏 수많은 탈락 사유를 접했지만, 응모자의 입장에서 이 말보다 잔인한 말은 없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응모자가 밤낮으로 써 내려갔을 작품을 그저 낯익음이 없지 않았다고 평한다면 응모자로서는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늘 새로운 발상만을 우대하는 카지노 게임의 풍토가 아쉽기만 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이 있다. 당장 2025 신춘 당선작만 보더라도 새로운 발상으로 볼만한 작품이 몇이나 있는지 살펴보라.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매일신문의 <폭설 밴드는 그보다 9년이나 앞서 발표된 2016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 당선작 <열 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 강혜빈와 비교해 봐도 학폭을 다루는 방식이나 담임을 깎아내리는 표현에서 전혀 새롭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훨씬 못하다는느낌이다. 그러니 낯익음이라는 그런 말이 아닌, 좀 더 분명한 탈락 사유를 말했으면 좋겠다. 신인의 투박함이니 패기니 그런 말로 카지노 게임을 올려치지도 말아야겠지만, 낯익음이라는 말로 내려치지도 않았으면.
이제 당선작에 대한 평을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심사자는 황현산 평론가와 김사인 시인이다. 늘 생각하지만 평론가는 평론을 심사하고 시는 시인이 심사했으면 한다. 평론가라고 시를 심사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평론에 길든 시선으로 시를 심사하는 건 대체적으로 숲 전체를 보기보다 각각의나무를 쪼개면서 평론가 특유의 철학적 시선으로 평하지않을까 염려해서다. 그래선지 개인적 생각이지만 당선작 선정에 있어 김사인 시인보다는 연배로도 훨씬 앞선 황현산 평론가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지노 게임의 당돌함 앞에서 우리는 불편한 동시에 설렜다.독자들도 그러할 것이다.그의 시들은 어딘가 불균형한 듯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새롭고 생생한 발화로서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정면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을 삶과 세계의 잔혹과 비극성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슬픔과 상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그의 언어들은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다.우리는 노련과 안정감보다 카지노 게임의 이 용기와 젊은 당당함 쪽을 선택했다.세상의 고통과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깊이 앓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빈다.
- 당선작을 보고 심사평을 보면 딴지를 걸 만한 표현이 없다. 불편한 동시에 설렜고, 같은 슬픔과 상처에 뿌리를 둔 남매임에도 대응 방식에 있어 동어딘가 불균형한 듯하지만 새롭고 생생한 발화로서의 매력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일한 감상에 젖지 않음이 이 카지노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따라서잔혹성과 비극성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남매는 대척점에 서서 각자의 생각을 그대로 발화하는데, 내가 심사자였어도 응모자의 용기와 발칙한 상상력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새롭고 생생한 발화를 빼고 카지노 게임성으로만 본다면 어땠을까?노련과 안정감보다 용기와 당당함을 선택했다는당선 사유가앞서 탈락자의 탈락 사유로 내세웠던노련함과 자신감의 과잉이시적 모험의 기개와 순결성을 손상하지는 않았는가? 이는 독자들도 곰곰생각해 볼 일이다.
....아줌마를 찢어발기자...... 아줌마는 가슴이 크니까, 그건 따로 잘라서 넣어야겠다, 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그녀의 가슴을 빨고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
카지노 게임자의 시선에는 대화체로 이루어진 대칭적 구조(=형식) 속에서 이러한 시적 표현들이 불편한 동시에 설레지 않았을까? <카지노 게임 교육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연의 여동생과 2연의 오빠는 같은 슬픔과 상처를 지녔음에도 서로 상반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좀 더 유추해 보자면 완전히 대척점으로 카지노 게임 원인이 교육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 교육의 반성이나 성찰, 혹은 젠더로 대표되는 시대정신으로 해석될 여지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또한 절묘하게도 현 상황에 빗대면 내란죄를 저지른 윤석열을 바라보는, 카지노 게임 교육에 따른 카지노 게임 시각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황현산 평론가가 평론가로서 돋보기를 들이댈 구석이 많은 이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편이다.
아무튼 좋은 카지노 게임임에는 분명하고,지금껏 내가 소개한 작품들이 당장 2026 신춘문예나 문학상, 문예지에 다시 응모한대도 여전히 당선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좋은 카지노 게임은 십 년이 넘어도 좋은 카지노 게임이라는데는 변함이 없음을또 확인하게 된다.그러니 현 추세를 따라가겠다고 최신 카지노 게임만 읽을 게 아니라 지난 카지노 게임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