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에 숨은 진실 (4)
※ 새로운 매거진[중국 여성의 성性과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제1탄은'측천무후에 숨은 진실'을 추적해 보는 이야기입니다.여성이 소재인만큼여성의 입장에서 서술해보고자합니다.
지난 스토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01. 측천무후인가, 무측천인가
<02. 아버지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 아들의
<03. 세계 유일의 부부 카지노 가입
약 1km 거리에서 촬영한 진시황릉.높이57m다.현재의 위치가 맞는지 불확실하다. 유명한 병마용갱은 이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1.5km 지점에 있다. 진시황릉은 역대로 수많은 사람이 도굴했다. 하지만 주검이 있는 묘실은 아직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주천천히, 아주 조금씩 발굴하고 있는 중이다.
높이로만 따진다면 건릉과 진시황릉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진시황릉은 57m.건릉은 무려 해발 1,048m다. 진시황릉은 인공 산이고, 건릉은 무덤을 닮은산을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산위릉因山爲陵’의 수법. 당 태종이 자신의 무덤인 소릉昭陵을 만들 때 최초로 사용했다는 이 방법은 건릉에서 최고로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산을 이용해서 만든 만큼 그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다. 그 정상에 올라 사방에 펼쳐진 황토대고원을 바라보면 상쾌한 탄산음료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탁 트인다. 지하에 도열한 진시황의 병마용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웅혼한 기상이다.
정문 상공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건릉. (출처: 건릉박물관 홈페이지) 정면에 보이는 양산 봉우리 아래, 사마도가 끝나는 부분의 고도는 700~ 800m. 정상의 높이는 1,048m다.
여러분, 저쪽을 보셔요.
우리가 방금 전 보고 온 카지노 게임 추천이 보이죠? 뭘 닮은 것 같지 않나요?
건릉에서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로 향하고 있는 버스 안.
소오생 가이더님이 그새를 못 참고 또 마이크를 잡으셨다.
아, 정말 쉴 틈을 안 주시넹? 방금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구서...
투덜대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이더님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오머머, 저거 모야?
으음... 에... 쪼오끔 거시기...아...왜갑자기땀이나지?하하... ^^;;;
건릉을 안고 있는 양산梁山은 멀리서 보면 여인네가 드러누운 모습이다. 근데 그 모습이 상당히 적나라하다. 천상벌거벗은 여인네다.
이 산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다. 제일 높이 우뚝 솟은 북봉北峰은 머리이고, 중간에 나란히 솟은 두 봉우리는 여인네의 가슴이란다. 근데 왜 내 눈엔 반대로 누운 것처럼 보이지? ^^;;;;
그 두 봉우리 위에 궐루闕樓가 보인다. 인위적으로 ‘유두乳頭’를 만들어놓은 거다. 아, 모야!어쩐지 유치한 ‘남성’들의 외설스러운 장난 같아 은근히 눈에 거슬린다. 저거, 언제 누가 만들어 놓은 거야? 확, 고발이라도 할까 부다... ^^;;;;;;;
가이더님이 책 한 권을 건네주신다. 2005년 5월 판 《중국국가지리中國國家地理》 잡지책이다. 건릉 특집 기사가 실려 있다.내가 무측천에 관심을 가진 걸 알고 주신 모양이다. 어떻게 아셨지? 호호.
잡지책을 읽으니더욱 거슬리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무조가 막 황후, 그러니까 측천무후가 되었을 무렵, 고종이장손무기長孫無忌와 태사령 이순풍李淳風에게 자신의 묘 자리를 구해오라는 명을 내렸단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그들은 우리가 올랐던 바로 그 양산의 북봉에 올라 크게 감탄하고 이곳을 천거했단다.
그때, 대신 원천강袁天罡이라는 자가 나서서 반대를 했다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그 산은 여인네를 닮았으니 필시 음기가 강할 것이옵니다. 이곳에 능침을 정하시면 훗날 여인네에게 조종을 당하여 마침내 폐하께서도 다치실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소서~”
했다나, 어쨌다나? 아 짜증... 근데그다음 이야기가 더욱 가관이다.
그 말을 들은 고종이 망설이자, 또 그 말을 전해 들은 무후가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야욕에 그날 밤 잠자리에서 고종을 완전 녹여버렸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그렇게 해서 건릉의 위치가 확정되었다는 이야기다.
참 내. 이것도 ‘남성’들에 의해서 조작 날조된 게 틀림없다. 아니, 남의 부부 은밀한 잠자리 이야기를 어찌 그리 잘 안담? 설령 무후가 그런 얘기를 했더라도 그렇지, 부부 사이에 의견 교환도 못하나? 어쨌든최종 결정한 사람은 고종이잖아. ‘남성’이 결정한 걸 가지고 왜 치사하게 ‘여성’을 걸고넘어진담?
‘요부’란 상대방 남성을 유혹해서 파멸의 길로 몰아간 여인이란 뜻이다. 근데... 무조가 남편과 나라를 파멸시켰나?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빛났던'정관貞觀 유풍遺風의 시기'라며? 니네 역사가들이 고렇게 써놓구서 웬 '요부' 타령?아 열받아...
문득 노자가말한 ‘현빈玄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요새말로 점잖게 풀이하면 ‘여성성女性性’이라는 뜻. 음양陰陽의 조화를 탄생시킨삼라만상의 원천이다.
나는 건릉의 지형지세가 ‘현빈’과 ‘음양’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뚝 솟은 북봉은 '머리'가 아니라‘현빈’, 산허리 두 개의 봉우리는 '여인네의 가슴'이 아니라‘음과 양의 조화’같았다.고종과 무후가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며 나라의 기틀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도 어쩌면 일찍부터 이런 곳에 터를잡아놓은 덕분이 아닐까? 어설픈 풍수가 노릇을 해본다.
근데 왜 자꾸 내가 전생에 측천무후였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모...꿈보다 해몽이라고,생각도 못하나 모? 헤헷.
네? 황후가 아니라 무수리? 깨몽하라구요? 미워엿!
건릉은 서기 661년에 착공, 684년에 고종의 유체를 안치했답니다.
몇 년 걸려서 건설한 거죠? 684 빼기 661 =23년이군요.
하하, 근데 땡~~ 틀렸답니다. 왜 그럴까요?
건릉은 측천무후가 황제인 무측천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 보수 공사를 했답니다. 언제까지? 그녀가 죽은 705년 무렵까지. 그러니까실제 건설 기간은약 44년 정도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 가이더님!
근데요, 카지노 게임 추천도 도굴이 되었나요?
헉...기어코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버스 맨 앞자리에서 가이더님의 해설을 들으며 입이 간질간질...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게 너무 많았지만, 어린학생들 눈치가 보여 꾹꾹 참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만것이다.
네? 아 네,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쌤이 모르는 걸 물어보면? 나뿐(!) 학생!
아는 걸 물어보면? 착한 학생이니깐요. ^---^
건릉은 한 번도 도굴을 당한 적이 없답니다. 당나라, 아니 역대모든 황제들의 능이 거의 대부분파괴되고 도굴당했지만, 카지노 게임 추천만은 도굴을 당한 적이 없다네요. 전문가들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니, 그렇겠죠?
왜요?왜 카지노 게임 추천만 도굴을 안 당했을까요?
앗... 뜨뜨... 어뜩해... 또 물어봤네... ㅠㅜ
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으니 그건 직접 알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 잡지책에 기사가 실려있는 것 같던데...
읽어보시고, 내일 버스 안에서 그 이유를 간단하게 발표해 주시면 어떨까요? ^--^
네에?
헉... 이럴 수가... 망했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가이더님이 급얄미워진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교수님 만나면 학교 다니기 급 싫어졌을 듯.
고종의 술성기비와 무측천의 무자비뒤에는 수십여 개의 목 없는 석상들이 서 있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한 국가의 사절단이다. 사마도의 우측에 29개 서쪽에 32개, 모두 61개 국가에서 조문단을 보내왔다는 이야기. 신라에서 보낸 사신은 어디쯤에 있을까? 저들은 왜, 언제 목이 달아난 것일까?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왜 전대前代의 유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걸까? 건릉은 많은 궁금증을 던져준다.
건릉을 도굴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도굴자의 이름이 알려진 것만 해도 17번. 그중3번의 대규모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대규모로 도굴을 시도한 자는 당나라 말에 농민의 난을 일으킨황소黃巢였다.
황소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부패한 조정때문에 연달아 과거에 낙방한다.질곡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반란을 일으켜 한때장안을 점령,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고황제에 오른다. 잔인한 정치로 곧 당나라 군사에 패퇴하고 산동 태산 근처에서 최후를 맞았다. 당나라 멸망을 재촉한결정적 사건이었다.
황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네? 아, 맞아. 신라에서 당나라로 유학 간 최치원(857~908?)의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討黃巢檄文 기억이 난다. 최치원의 문집《계원필경桂苑筆耕》에 수록된 글이었지? 와, 수십 년 전 고 3 때 외운 걸 아직도 기억하다니... 나두 제법인 걸?ㅋㅋ
아무튼 황소는 40만 대군을 총 동원하여 건릉을 필사적으로 파내려 갔지만 고작 암반40m 정도 파헤치고는 물난리를 만나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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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문 도굴꾼이었다는 오대五代 시기 요주자사耀州刺史였던 온도溫韜라는 자였다. 지방관地方官의 권력을 이용, 공개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당나라 황제들의 능을 모조리 도굴한 자다. 그는 수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마지막으로 건릉의 도굴에 나섰지만, 난데없는 광풍과 폭우를 만나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단다.
(상) (하) 1914년 프랑스 고고학자 Victor Segalen이 촬영한 카지노 게임 추천의 모습
세 번째는 20세기 초의 국민당 장군 손연중孫連仲이라는 자였다. 비전문가였던 그는, 여기저기 폭약으로 집적대며 암반을 깨뜨려보다가 결국 포기하였다고 한다.
건릉 앞에 선 국민당 간부들. 좌에서 두 번째가 일인자 장졔스(蔣介石), 세 번째가 그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 다섯 번째가 당시 서안의 군벌 장쉬에량(張學良)이다.
(상) 1914년의 카지노 게임 추천 사마도. (하) 2024년의 같은 장소.
그들이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광대한 묘역 안에 숨겨진 묘도墓道의 입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산은 대부분 매우 단단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입구를 찾지 못하면 원천적으로 도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1958년.
묘도의 입구가발견되었다.
돌을 캐기 위해 폭약으로 암반을 깨던 현지 농민들이 우연히 발견했단다. 고고학자들이 은밀히 불려 왔다. 그리고 일 년 여에 걸쳐 점검해 본 결과, 입구의 석문은 완벽하게 봉해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건릉이 당나라 황릉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유물을 온전하게 발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그들은 서둘러 드러난 석문을 덮어버리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감쪽같이 위장해 버렸단다. 입구의 위치는 그렇게 중국의 국가 일급비밀이 되어 버린 것이다.
1980년대의 건릉. 이 무렵에 하마터면 무대뽀로 발굴할 뻔했다.지하 묘도의 입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중국 고고학계는 매년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이제는 건릉을 발굴할 만한 기술을 갖추었으니 비밀이 새기 전에 발굴을 시작하자는 주장. 아직도 그럴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란다. 과연 발굴을 해야 할 것인가, 미루어야 할 것인가?
건릉의 지하궁전이 발굴되면 경천동지驚天動地, 땅이 흔들리고 하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진시황릉이 완전히 발굴되면 또 무엇이 출현할지는 모르겠으되, 건릉의 발굴은 그보다 더한 사건이 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예측이다.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술성기비’가 전하고 있는 고종의 유언 내용이다.
고종 이치는 자신이 아꼈던 서적과 글씨와 그림들을 모두 수장收藏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무측천이 그 부탁을 지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남편의 무덤이자, 그녀 자신의 안식처 아니던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국보급 유물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하다. 어쩌면 중국문화사, 아니 중국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는 건릉 주변에 위치한 배장묘의 유물이다.
건릉은 17 기基의 배장묘를 거느리고 있다. 그중 5 기의 배장묘가 발굴되었는데, 모두 수 차례 도굴 당한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분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건릉에 무엇이 얼마나 있을지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전문가들이 면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건릉의 지하궁전에는 금은보석과 각종 도자기, 기물器物, 석조물, 조각, 서적, 그림 등이 최소한 500톤 이상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5톤도 아니고, 50톤도 아니고, 무려 500톤이란다!그야말로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나 나올 법한 엄청난 보물창고 아닌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하루속히건릉을 발굴했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그 찬란한 대당제국의 문화와 예술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어쩌면 무측천의 미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 세기 동안 그 넓은중국 땅을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었던 위대한여성 황제.그녀의 미라를 발굴해서컴퓨터로생전 용모를 복원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신비할까!
무측천은 매우 많은 글과 시를 썼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녀의 작품집인 《수공집垂拱集》100 권과《금륜집金輪集》10권도 틀림없이 그 안에 있을 거다. 그런 글을 통해서 그녀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뒤집어써야 했던 오명이 벗겨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와~~
멋있어요!!
찬사와 함께 박수 소리가 터졌다.내 발표를 들은 학생들이 물개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버스 안이라서 더 크게 들리는 듯.음... 모... 기분... 그럭저럭 괜찮네? 내가 생각해도 쫌 잘한 듯. 헤헤 ^^
옛날에 교생 실습 해 본 이후로 정말오랜만에 학생들 앞에 서니, 교수가 되고팠던 꿈을 이룬 것 같다.발표를 시켜준 가이더님이 쫌 고맙기도 하다.발표하는 내내혹시 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까 봐, 옆에서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자세였던 모습이 쫌 예뻐 보인다. ㅋㅋ
아, 발표 너무너무 잘하셨어요. 그 어려운 원서도 잘 읽어내시고, 정리도 아주 잘하셨고, 꾀꼬리 목소리로 발표도 깔끔하게 아주아주 잘하셨습니다. 그치만 나이 제한에 걸려 상금은 없사오니 양해해 주셔요~ ^^;;
그렇습니다.카지노 게임 추천을 발굴하면진시황의 병마용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거라네요. 그러면 전 세계에서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겠죠? 그럼, 중국 정부는 떼돈을 벌어서 국가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네요.
근데요, 저도 무측천을 너무너무 보고 싶긴 한데요,돈독이 올라있거나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몰려들면 좋은 일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게 역사의 교훈이라서 살짝 걱정되기는 하네요. 모쪼록 중국 정부가 현명하게 판단하길 희망합니다.
모야 이거. 지금 칭찬한 거야? 치잇... 어쩐지 아닌 것 같은데?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말도틀린 게 없는지라...나는 얼른 내 욕심을 포기하고, 발굴 반대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그 전날로 돌아가서...
건릉을 떠난 버스가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에 도착했다.
근데, 어라?
버스가 잘못 온 것 같은데?
가이더님, 여기 맞아요?
영태공주묘가 아니라 '카지노 게임 추천박물관 乾陵博物館'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아, 건릉박물관이 영태공주묘랍니다. ^^
네? 왜요?카지노 게임 추천박물관이 왜 카지노 게임 추천에 있지 않고 영태공주 무덤에 있는 거죠?
아, 그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답니다.
가이더님이 마이크를 잡는다.
첫째,영태공주묘와 건릉은 별개가 아니랍니다.건릉에는 배장묘가 17 개 있어요. 배장묘란 황제의 가족과 총애하던 신하의 무덤을 말하죠. 그래서 죽어서도 같이 지내라고 황제의 무덤 묘역안에 배장을 한 거랍니다.
그러다 보면 황릉 전체 면적이 무지 커지겠죠? 그래서카지노 게임 추천 전체 면적은 무려2.4㎢!여의도 전체 면적(4.5㎢)의 절반이 넘어요. 아무튼 영태공주묘도 건릉의 일부라는 사실! 그러니까 여기에 건릉박물관이 있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 이해되셨죠? ^.~
둘째, 카지노 게임 추천의 배장묘 중에서 현재 발굴된 무덤은 5 군데인데요, 그중에서 관람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는 곳은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와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 그리고영태공주묘예요.
이 세 곳은모두 관이 있는 지하 묘실墓室까지 들어가 볼 수 있어요. 그중에서도 건릉의 지하궁전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가장 잘 달랠 수 있는 곳이 영태공주묘이죠. 그래서 여기에 카지노 게임 추천박물관을 만든 거랍니다.
그런데 영태공주묘는 우리의 그 아쉬움을 어떻게 달래줄까요? 영태공주의 비밀을 밝혀라! 오늘의 미션입니다. 이따가 영태공주 지하 묘실에 가서 잘 찾아보셔요~!? 상금 걸려 있는 거, 다들 아시죠? ^^
하하, 또 미션이군. 처음엔 은근 스트레스받았는데 나도 슬슬 적응이 된다. 상금이 걸려있으니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어진다.
< 계 속
전문가들이 자료를 근거로 추측한 건릉 지하궁전 묘실. ① 고종 이치② 무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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