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치 터널을 뚫고 나가는 경주마처럼 목표가 생기면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안 될 이유를 고민하는 대신,될 방법을 찾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회사에 다닐 때도 그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루를 전쟁처럼 시작했고,밤늦게까지 책상 앞을 지키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시키진 않았지만 스스로를 닦달하고 채찍질하며 달렸다.
프리랜서는 유연하게 근무할 수 있지만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임금은 통장을 스칠 뿐, 불안정한 수입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월급날 정하기 월급날을 정하자. 수입이 들어오는 날과 상관없이 한 달에 한 번만 일정 금액을 인출해 그 금액 안에서만 사용하는 거다. 남는 여윳돈은 저축하거나 다시 투자하는 방식으로 불려 나가자.
엄마는 프리랜서 특별한 공간 속 견고한 나의 시간 위에 견고한 우리들의 시간 타임테이블 위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래 그리고 고마워, 미안해, 감사해 친구들 마음에 행복이 가득할 때 나도 함께 기뻐해 줄게 친구들 마음에 반창고가 필요할 때 나도 함께 위로해 줄게 항상 받기만 해서 어쩌지 이 글을 본 나의 소중한 친
신림동의 밤은 언제나 분주한 움직임의 연속이었다. 길게 뻗은 가로등 아래로 흐르는 사람들, 늦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깨어 있는 상점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려오는 어딘가 익숙한 소음까지. 이곳에선 단 한순간도 침묵이 허락되지 않았다. 대학 시절의 풋풋함은 이제 희미한 과거 속에 자리 잡았고, 나는 스물여섯이라는 전환점에서 불안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곁에
영국은 시간당 페이가 다 적혀있는데, 한국은 죄다 급여 협의라 적혀있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음악 분야는 프리랜서라 그런지, 시간당 페이가 안 적혀있다. 그래서 한국 오기 전까지 이렇게 강사 페이가 낮은지 몰랐다. 내가 시간당 2만 원대 받으려고 영국에서 석사까지 받아왔겠나. 그래서 내가 가능한 최소 페이를 그냥 이력서 또는 메일에 적는다.
1막. 퇴사 "요즘 뭐해?" - "그냥.. 뭐 해 ㅋㅋ" 퇴사한지 1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백수다.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왠지 머쓱해서, 설명하기 복잡해서 '그냥 뭐 한다'라고 대답한다. 그럼 대부분 '아~ 프리랜서~'라는 반응이다. '돈을 벌어야 프리랜서지 ㅋㅋㅋ'(우는거 맞음) 이 말은 그냥 속으로 삼킨다. 퇴사. 잘 되리라는 확신은 없었지
화요일 밤 11시. 나는 침대에 반듯이 누워 요가의 송장 자세를 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남편은 옆에서 허리를 구긴 채 앉은 듯 누운듯한 자세로 아이패드를 보고 있다. "근데 나. 영영 재취업 못하면 어쩌지?" "뭐?" 남편이 귀에서 헤드폰을 빼고 되묻는다. "나. 영영 재취업 못하면 어쩌냐고." "할 거야." "못 할 수도 있지." "자꾸 그렇게
첫 날은 그렇게 점장님과 함께 했고 두둥 대망의 혼자하는! 둘째 날 알바가 시작되었다.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해야하는 일을 시간 순서로 정리해보겠다. 1) 와서 전 교대자와 인수인계를 해야한다. 사진에 보이는 화면에 현재 포스기 안에 각각 지폐와 동전이 몇장씩 있는지 입력해 넣어야하고 과부족이 0이 뜨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보통 내가 교
번역가와 10초 안에 친해지는 법 이전 편 <번역으로 남편을 찾을 수 있다>에서 썼다. 나와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누군가를 멀리하기보다는, 관심사가 조금 통하면 마음을 열어 가까워져도 좋겠다고. 그리하여 번역가(나)는 몇 달 전부터 혼자 일하던 집에서 나와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일을 하고… 혼자가 익숙
최근 그래도 한 달 150은 벌 수 있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00만 원 정도 벌 수 있는 마케팅 일을 잡았다) 여전히 일은 들쑥 날쑥하게 들어온다. 그래도 그중에서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솎아 내며 천천히 일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돈을 줄이며 사는 삶은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이것저것 생존에 필요한 노하우는 습득하고 있는 중이다. 냉동 식
가죽 공예 수업이 아닌 판매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어떤 제품을 판매해야 할지 수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잘 만들 수 있는 제품 이어야 하고 고객의 만족에도 충족할 수 있는 제품 이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어떠한 제품을 만들기로 정하면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직접 해보고 샘플도 만족스러운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제작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독립탐정언론 <신흥자경소>에 2025년 4월 18일(오후 7시 20분) 올라온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신흥자경소] 누군가 아래와 같은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질문 : 직장을 다니는 30대입니다. 저는 직장을 다니는 게 너무 힘듭니다. 매일매일이 고통입니다. 직장 생활 초년엔 누구나 힘들다고 하지만, 저는 입사 후 1년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정말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내 손을 들여다보면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날. 시험도 치고, 일도 하고,사람들과 부딪치고, 애쓰고, 노력하고…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는데,막상 돌아보면 내가 뭘 이룬 걸까?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끊임없이 되묻게 되는 날.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 같은데,나는 아직도 ‘되는
아빠는 직장생활에서 새로운 환경이나 일로 인해 힘든 경우가 많았지만, 퇴근하면 일에서 벗어나고 잊어버릴 수 있는 공간이 생기더라. 그런데 프리워크(사업자)의 길로 들어선 딸은 직장과 퇴근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런지 일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걱정이야.돈 버는 일과 개인(가정)의 일을 구분 짓고, 자신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잘살고 있는 것인지, 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때가 있다. 최근 들어서 나를 놓는 방법에 대해 연습을 해보았는데 처음에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이렇게 편안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점점 깨닫게 되었다. 가끔씩 몰려오는 현실적인 불안감이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면이라던지, 내 본업의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이라던지…이러한 생각이 벼랑 끝까
스물여덟에 창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도전이 이번 달에는 폐업과 마주하게 될 것 같은지 매일 신경 써 살펴야 했다. 서른여섯에 창업을 접고 회사원이 되었지만, 언제인지 모를 퇴사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은 늘 등 뒤를 찜찜하게 했다. 안정적인 수입과 경제적 자유, 여유로운 일상을 보장하는 일자리는 선물처럼 쉽게 얻을 수 없었다. 특히 내가 사는 비수도
학교를 다닌다.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야 한다. 시험날짜는 다가오는데 공부할 게 밀려있다. 매일매일 공부할 게 쌓이는데 이상하게 공부할 시간은 없다.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며 괴로워하다 잠에서 깬다. 깨서도 한동안 멍. 꿈이구나. 시험 볼 거 없구나.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안심.이런 꿈을 연 사흘 꾸고 나서 생각했다. 왜 이런 꿈을 꾸지. 학교 졸업한
좋으니깐 더 자주 찾지 않아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어느 기억 때문이었다.예전엔 비만 오면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곤 했던 나에게,그건 거의 센세이션급의 변화였다. 비가 내리는 오늘, 나는 오랜만에 카페로 향했다.남들은 비가 온다 해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을 간다지만,프리랜서라는 특권(?)을 살려오늘의 목적지
유튜브나 스레드, 인스타그램 릴스에서는 프리랜서로 월 1000만 원 이상 버는 방법, 대기업 직장인의 2배 이상 연봉 만들기 등 자극적인 제목들로 알고리즘을 이끌어낸다. "난 꼭 퇴사해서 일러스트 외주도 많이 받고 월 1000만 원 이상 버는 대박 난 작가가 될 거야." 라고 마음먹고 프리랜서로 지낸 지 어연 3년 차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몇 달 전
[말랑한 조랭일기] 1. 혼자 살지만 괜찮아 올해로 6년 차 일러스트레이터인 내가 타지에서 독립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본가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2024년에 경기도에 가기로 마음먹었는데 보증금을 입금하고 이사가 끝날 때까지도 독립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는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야 나 혼자 살게 됐다는 점이 실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