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선생님! 교수님 올라오신대요. 회진 갑시다."
6년제 의대의 마지막 학년이었던 나는 모교의 대학병원에서 실습 중이었다.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그 위에는 하얗고 빳빳한 가운을 입은 채 복도 구석에서 기둥처럼 서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의대 실습생들은 교수와 전공의의 뒤를 어색하게 따라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바로 딱 그 모습으로 나도 회진을 따라다녔다. 긴 가운은 단추를 모두 잠근 채로 단정히 입고 거슬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걸었다. 손에는 환자 명단이나 노트를 들고 회진 때 주고받는대화를 의미도 모른 채 받아 적었다.과도하게 단정한 차림으로 삐걱대며움직였다.실습생이 하는 일은 회진 따라 돌기, 환자 문진하기, 논문 읽고 발표 준비하기, 검사와 치료 참관하기 등으로 다양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병원의 사정으로 우리의 교육은 1순위가 되지 못했다. 하루 중 기둥 역할을 하는 시간이 절반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한참을 서있던 나는 회진을 가자는 전공의 선생님을 따라 빠른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학생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참으로 이상한 호칭이지 않은가?학생이면 학생이고 선생님이면 선생님이지 '학생 선생님'이라는 게 대체 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호칭에는 많은 고민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의대 실습생들은 교수와 전공의의 지도하에 실제 진료에 참여하곤 했는데 환자를 만나 문진을 하고 간단한 신체 검진은 직접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를 학생으로 소개하고 진료를 맡기면 환자들이 불안해하거나 간단한 진료조차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한 실습기회를 잃지 않도록 약간의 존중을 담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뒤에 붙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 학생이긴 하지만 선생님이기도 하니까(?) 안심하시도록. 정말 고맙군. 학생이지만 선생님의 역할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그 경계에 있는 것이 실습생이었다.
솔직히 그보다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바쁘게 붐비는 병동 한복판에서 누군가 우리를 부르려고 "선생님!"이라고 외친다면 수많은 다른 선생님들이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병동에는 간호사 선생님, 인턴 선생님, 전공의 선생님 등 '진짜' 선생님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강상록 선생님!"이라고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담당 전공의가 아니라면 누구도 우리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쁜 병원에서 우리의 이름은 불필요한 정보였다. 기둥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학생 선생님'은 우리를 부를 적당한 호칭이 없어서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무시와 존중, 상징과 실용성이 공존하는, 나를 부르는 이들의 고뇌가 함축되어 있는 호칭인 '학생 선생님'.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애매한 경계를 담당하던 나는 수개월 후 국가고시를 치른 후 의사가 되었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고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모두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번에는 ‘인턴 선생님’이었다.
의사가 되었지만 기쁘지 않고 불안했다. 어제만 해도 학생이었던 내가 시험을 합격했다는 이유 만으로 오늘은 선생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학생 선생님'이라는 완충지가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턴'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붙었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인턴이라면 모든 일에 좀 용서가 되는 느낌이니까. 정말 정말 고맙군.
'이렇게 의사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고민과 동시에 나의 대학병원 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실습 중에 보았던 병원은 전쟁터였다. 고함치듯 처방을 전달하는 의사들의 목소리, 후배를 다그치고 환자를 달래는 간호사들의 바쁜 움직임, 왜 병실에 오지 않느냐고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환자들의 외침, 그 와중에 울려 퍼지는 응급 상황을 알리는 방송 소리와 모든 일을 팽개치고 뛰어가는 의사들의 뒷모습. 마음을 굳게 먹고 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파란색 당직복과 긴 가운을 전투복으로 입고 큼지막한 가운 주머니에는 펜, 가위, 플라스터(병원용 테이프), 라텍스 장갑, 드레싱(소독) 재료 등의 무기를 넣었다. 크록스 신발을 전투화로 신었고 언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 머리는 짧게 잘랐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일단은 부딪혀야 했다. 모두들 그렇게 하니까.
환자복을 벗고 퇴원하는 사람들처럼 나도 반드시 살아남아 병원에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전쟁의 기록이다.